2025/04/18
잠시 글쓰기를 쉬었다. 의무감에 글을 쓰기 시작하니 내 안에 있지도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굉장히 긴 시간이 흘러간 듯했는데 마지막 글이 지난 달인 것을 보니 그래도 몇 달간 꾸준히 글을 썼던 것이 몸에 배어가는 중이었나 보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뒤로 집 근처의 프린트 스튜디오에서 오랜만의 작업에 헤매며 아쉬운 실크스크린 작업을 했고 생각보다 너무나 멋진 런던의 봄에 취해 공연, 전시, 러닝 등을 실컷 하다가 감기인지 독감인지가 걸려 열흘을 꼬박 앓았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계약된 세 달이 지나서 정신없이 짐을 싸고 갈 곳을 정하고 청소를 하고 그렇게 런던을 떠났다.
영국에 오자마자 편한 사람이 하나 있어 꽤나 든든했었다는 것이 각자 다른 역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인사를 나눈 횡단보도에서 친구가 끄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멀어지며 실감이 났다. 내 삶은 집을 떠난 2015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스스로 밀쳐 넣은 위기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맴돈다. 온몸에 힘을 주었다 빼었다를 반복하면 근육만 붙는 것이 아니라 주름도 함께 진다.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엔 친구들의 작업과 글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항상 큰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런던이 아주 재미있는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내내 복잡한 감정이 들었었다. 제국주의의 심장이라는 역사적 토대 위로 자란 파릇파릇한 자본주의의 열망과 자긍심, 그에 대한 증오와 불만을 먹이로 삼아 피하지 않고 버티며 싹 틔운 문화는 내가 지난 10년간 경험한 다른 영미권 국가들(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과는 매우 다르다. 민주국가로서의 역사가 짧은 남반구의 두 나라의 대도시에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생각과 생각의 충돌이 매일 일어나는 곳이 런던이다.
런던에서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웨일스의 시골마을로 다섯 시간 여를 오는 동안 창 밖의 풍경은 뉴질랜드를 꼭 닮아 있었다. 목초지와 양, 소, 사슴 떼. 적당한 크기의 섬나라에 기후마저 비슷하니 뉴질랜드의 숲과 들판을 목초지로 개간하며 설렜을 영국출신 뉴질랜드 이민자들의 모습이 쉽게 상상된다. 런던에서는 어느 정도 군중 속에 묻히는 것이 가능했지만 인구 육천명의 마을에서 내 외관은 누구에게나 발각된다. 산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민들이 종종 인사를 건넬지 말지 어색해하는 것을 안다. 시골에는 어쩌면 그 마을에서 평생을 살고 죽을 사람들이 도시보다 훨씬 많다. 그런 곳에 우연히 떨어진 운석처럼 당도하는 것. 런던의 월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우연히 오게 된 사연을 위한 포장은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집에서 지낸 2주 동안 나는 빵을 굽고 고양이를 돌보고 정치 뉴스를 보고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작업을 하기 위해 여기 왔어'라고 했다. 여전히 그것이 어떤 작업인지 모르겠다. 고작 1년 전, 작년 이 맘 때에는 뉴질랜드에 있었는데. 그때 나만 보고 덜렁 뉴질랜드로 날아왔던 친구가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갈무리 전시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작년 이때를 되돌아봤다. 푸른 호수와 눈 쌓인 바위 산 위로 해가 지면 어둠 위로 은하수가 쏟아지던 내 창문과 여행에서 돌아오면 짐도 풀기 전 먼저 돌보아야 했던 작은 텃밭. 그런 산뜻한 시간이 권태가 되어 견딜 수 없었던 날들. 그때 모아둔 갈아쓸 시간이 며칠 치나 더 남아 있나.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 것들과 숨은 것들이 세상 곳곳에 허다한데 욕심 좀 부려서 300년만 통장에 넣어 둘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런 다음에야 지금의 생각과 말들은 원래의 것이 아니게 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