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로 주고받은 여덟 통의 편지, ‘민선 언니’와의 인터뷰 비하인드
“언니도 언니가 필요하니까”
끗질은 중장년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여성 인터뷰 프로젝트다. 시즌1에서는 4050 언니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단행본에 실린 인터뷰 전문 외에 프로젝트에 기획부터 언니들을 만나는 과정을 담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릴레이 연재로 소개한다.
*메일에서는 늘 민선님이라고 불렀지만, 이 글에서는 슬쩍 언니라고 호칭을 바꿔본다.
팬데믹으로 비대면 모임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받은 건 참 오랜만이었다. 질문지가 있는 질의응답이 아니라 편지로 묻고 답하는 인터뷰라니. 21세기에 누릴 수 있는 낭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민선 언니와의 인터뷰는 희경이 주도했고, 나는 보조의 역할이었으나 그렇다고 편지의 추신만 쓸 수는 없어 온전한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세 달에 걸쳐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펜팔이 생긴 듯했다. 수신인은 멀리 사는 친구의 언니. 희경이 책상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썼다면, 나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일기를 쓰듯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우리는 각자 다르게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썼지만 마지막은 비슷했다. ‘그래서 언니는요?’
민선 언니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꼈던 까닭은 ‘이해민선’과 ‘은다강’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둘 다 본명에서 나왔지만 의미와 분위기는 본명과 전혀 다른 이름이다. 이름에 얽힌 비하인드로 출발한 편지는 ‘우리의 몸’과 ‘십 년 뒤 미래’를 거쳐 ‘사랑’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 배경과 작가의 생애를 두루 알아야 한다는데, 언니와 주고받은 여덟 통의 편지가 꼭 그 과정 같았다.
하루 이틀 두어 시간 만나 진행하는 다른 인터뷰와 달리 편지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 시간에는 꿈과 환상의 나라로 놀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 하는 마음과 다녀와서 예전 기억만큼 신비로운 느낌은 아니라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였다.
민선님이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 저는 롯데월드에 있을 거예요. 오래된 로맨스 영화에서 편지로 작별 인사를 건넬 때 쓰던 멘트 같네요. 하지만 정말로요.
어떻게 보면 언니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꿈과 환상, 그 자체 같기도 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엄마의 뱃속에 있던 내가 당시 서울의 거리를 알 리 없다. 언니는 편지에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불쑥불쑥 나타나 자라온 시절의 풍경을 들려주었는데, 나는 그 거리를 언니와 함께 걷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검은 아스팔트가 이미 딱딱한 도로 위를 또 덮어 땅이 좀 더 두꺼워졌을 때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지요. 초등학교 바로 옆이 올림픽 공원이었어요. 학교에서 매일 올림픽 노래 악보를 나눠줘 가면서 부르게 했어요. 얼마나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넘어야 했는지. (중략) 깨끗한 하늘의 크기와 평평한 바닥의 넓이가 만나 광활했고 쾌적했어요. 그 쾌적함은 고요한 새벽 공기와 함께 묘한 위안을 주기도 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그런 그곳이 여느 지역보다 환경미화의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공권력이 다른 차원으로 일어난 동네였겠다 싶어 검색을 해보니 역시나였어요. 베이징 올림픽의 뒷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감쪽같던 그 쾌적함에서 받은 위안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어요.
내가 궁금해하던 어떤 미래는 언니의 과거이기도 해서, 우리는 편지는 대부분 미래와 과거의 중간에서-그러나 반드시 현재는 아닌- 곳에 있었다.
시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언니를 알아가는 만큼 내 이야기도 쏟아내야 했다. 편지에 흘린 이야기가 모여 나를 이룬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러니까 저는 서울공화국에서 변두리를 빙빙 돌며 솜사탕처럼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었나 봅니다. 견고하지 못하고 성긴 모습으로요. 정체성이라는 게 그런 건가 싶기도 합니다. 아주 약한 실들이 자라온 풍경들을 듬성듬성 휘감고 있는 것. 하지만 하나하나 분리해 보기는 어려운 것.
나는 정체성은 살아가면서 덧붙이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 막대 위를 가늘고 끈적한 설탕 실로 칭칭 감싸 만드는 솜사탕처럼 말이다.
저의 작업들에서는 건축도면으로 도시의 육체를 표현한 초기 작업에서부터 최근 붉은 대지 위의 사물들까지 자라온 풍경의 타임라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해요. 이런 작업들을 묶는 이름 중에는 ‘덜 죽은 자들’이나 ‘덩어리’가 있어요.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대상들은 정체성이 확정적이지 않지요. 어떤 상황과 어떤 대상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요. 그러나 구체적인 실체이지요. 솜사탕만큼 찰떡 이론을 붙여봐야 봐야겠어요.
언니의 말하는 정체성은 전혀 달랐다. 구체적인 실체가 있지만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정체성. 수수께끼 같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애벌레의 변태 과정은 꼭 언니가 말한 그 정체성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용해되어 수프가 된다. 나비도 애벌레도 닮지 않았지만 애벌레였던, 그리고 나비가 될 수 있는.
어쩌면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고치 수프를 만드는 레시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홀로서기라는 게 가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일처럼 막막하게만 보였는데, 일단 나라는 고치 안에서 마음껏 녹아내려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다음엔 뭐든 될 수 있고, 뭐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어떤 내가 되더라도 여전히 나일 거라는, 찰랑이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민선 언니와의 인터뷰 전문은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되는 끗질 인터뷰집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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