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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다강 Jun 18. 2022

은지 | 넘어진 나를 다시 일으키는 뿌리의 힘

끝없는 홀로서기 중인 ‘은지 언니’와의 인터뷰 비하인드

넘어진 나를 다시 서게 만드는 뿌리의 힘

여성 인터뷰 프로젝트 ‘끗질’

“언니도 언니가 필요하니까”

끗질은 중장년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여성 인터뷰 프로젝트다. 시즌1에서는 4050 언니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단행본에 실린 인터뷰 전문 외에 프로젝트에 기획부터 언니들을 만나는 과정을 담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릴레이 연재로 소개한다.     



남들은 학창 시절 스무 살에 대한 로망이 컸다는데, 나에게 스무 살은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스무 살이 되면 청소년 버스 요금 할인도 못 받는데, 천하태평 청소년 시절이 이렇게 끝난다니. 청소년기를 이미 자유분방하게 살아서 어른이 되어 누릴 자유는 생각도 못 하고 어른의 책임만 무겁게 다가왔다. 어른이 이렇게 휘뚜루마뚜루 사는 건 줄 알았다면 나이 듦을 고민할 시간에 청소년기를 더 즐겼을 텐데.


나이 먹는 걸 일찌감치 두려워해서일까. 서른은 아무렇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스무 살도 지나왔는걸. 50대인 은지 언니는 스무 살이 곧 자유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가장 큰 일탈이 하교 후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은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대입 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환경이 변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봄 기운이 완연한 날에 일산의 한 공원에서 은지 언니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빈 손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하던 언니는 아이스박스에 한가득 주전부리와 차를 싸왔다…(훌찌럭)



제주에서 나고 자라 육지로 나온 지역 청년, 장녀, 시집살이, 무능력한 남편, 세 아이의 엄마, 생계부양자, 방문 학습 교사. 언니의 이야기는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자꾸 뻗어나갔다.


이상했다.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언니의 삶이 나와 겹쳐 보였다. 성향도, 살아온 길도, 나이도 전혀 다른데 언니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육지에서의 30년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가는 언니의 고민은 나도 요즘 들어 부쩍 하는 고민이었다. 삶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이젠 변수가 상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홀로 서는 이야기를 했다.



홀로 선다는 건 완성형이 될 수 없고, 영원히 다시 일어서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나는 제대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면 넘어진 채고. 다시 일어섰는데 아직 중턱이고 갈 길은 한참 남아있고요.


“맞아요. 그래도 영원한 건 없고 끝은 있는데 그 끝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인생은 각자 주어진 끝을 향해서 가는 과정인 거지. 그러니까 잘 살았니 못 살았니, 이룬 게 많고 적고 따질 필요가 없어요. 그거 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가는 과정에서 덜 슬프고, 덜 괴롭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마지막 순간에 그런 거 있잖아요. 후회 남고 서럽고 그런 게 아니라 지치고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나 좀 잘 살다 가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성공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요즘 많이 들기는 해.


한때, ‘나는 행복해지는 게 꿈이야.’ 이런 생각할 때가 있었어.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찾던 게 행복이 아니더라고. 욕심인 거야, 내 욕심. 오늘 만든 파스타가 맛있게 만들어졌다면 그것도 행복인데, 그걸 못 느꼈던 거지.



언니는 요즘 인생 2막을 준비 중이다.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온 지 30년, 육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서 일구는 삶이다.



“객지 생활을 30년 했어요. 친구들 만나서도 얘기를 그렇게 했는데 보통 30년이라고 하면 나무만 봐도 뿌리를 엄청 많이 내렸을 것 같잖아요. 뽑으면 큰 뿌리가 막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잔뿌리 하나 없어(웃음). (여기 생활 정리하는 게) 깨 털듯이 너무 가벼워.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하면서 사는 게 아니고 그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까 지금 이렇게 온 거거든.”



언니는 지난 30년이 하루살이 삶이라고 말하지만, 세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생계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지 나는 겨우 나 하나를 먹이고 입히면서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언니는 이혼하던 즈음 살았던 도시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이혼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고 학습지 교사 일도 한창 바쁠 때였다. 하루에 50과목을 가르치고 나면 이미 자정이었다.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이 없을 만도 하다. 언니에게 그곳은  벌고, 먹고 자는  외의 삶이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그 동네는 애들 셋이 유일하게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같이 가지고 있는 곳이에요. 나는 애들 데리고 나온 기억이 있어서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애들은 아니더라고. 막내는 이제 유치원 막 다닐 때였고, 첫째는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세 남매가 다 거기에 뭔가 끈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고향 같은 곳인 것 같아.”



언니가 생각하는 고향은 사람과의 추억이 고리가 되는 곳인 듯하다. 뿌리 없는 삶을 30년 동안 살고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건, 고향에서 이어진 아주 깊고 단단한 뿌리가 언니를 붙들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동안 우리의 홀로서기에 마침표를 찍을 순 없겠지만, 나를 지탱하는 끈은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몇 번이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서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도록.


인터뷰를 마치고 제주도로 가기 전에 밥 한 번 먹자고 언니와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따뜻한 손의 온기에 언니와 나를 연결하는 끈이 슬그머니 생겨나는 걸 느꼈다.



(은지 언니와의 인터뷰 전문은 7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되는 끗질 인터뷰집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끗질 뉴스레터]

격주 화요일마다 끗질의 활동과 인터뷰 이야기를 담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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