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뉴턴, 아인슈타인, 사르트르, 양자역학
읽어내는 힘과 사고 실험
-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고전 물리학과 상대성이론
하이데거는 인간을 ‘스스로 존재 의미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현존재’라고 정의한다. 현존재는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게 아닌,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의 요구를 내면화하며 살아가기에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본래적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곤 한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인간을 ‘세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비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세인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익명성을 지닌 모든 타인이기에, 세인의 일원이 된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성을 잃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비본래적 삶에서 해방되어 본래적 삶으로 나아가려면, 삶의 유한성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인간이 반드시 맞이하게 되기에 확실성을 가지며, 삶의 일부분으로서 ‘아직 오지 않음’의 상태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현존재 외부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나 스스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이기에 대체 불가능성을 지닌다. 따라서 죽음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며, 나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할 때 자신의 진정한 개인적 삶을 인식하고 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걸로 그치면 본래적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죽음을 인식만 하면 현존재는 불안을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스스로를 세인으로 전락시켜 죽음을 은폐하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대해 잘 실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외면하며 죽음의 확실성을 부정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회피와 무관심이 현존재를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삶의 변화를 위해, 죽음이 주는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대면하여 선취하라고 요구하였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가능성 앞에 자신을 세워봄으로써 과거의 비본래적 삶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결단을 통한 실존적 삶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본래적 결단은 단지 삶의 태도를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해석의 순환 과정을 겪는다. 인간 존재는 선입견을 바탕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입견을 발전시키며 다시 발전된 선입견을 바탕으로 해석 활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인간 존재의 이해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완결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흔히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과학적 언술도 완결되지 않은 조건부 진리이며, 객관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세인'의 틀을 벗어나 본래적 자아를 찾으라고 한 것처럼, 과학의 역사 또한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절대적 전제'를 의심하고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다. 과학자 역시 하나의 현존재로서 자신이 처한 시대의 선입견(고전 역학) 안에서 세계를 해석하지만, 그 한계를 포착하는 순간 우주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어낼' 가능성을 얻게 된다.
또한,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은 ‘차별화된 삶’이라기보다, ‘익숙한 전제를 의심해보자’라는 태도와 같다. 과학의 혁신도 유사한 지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이하곤 한다. ‘당연한 것’의 견고한 지지대가 흔들릴 때, 세계가 다른 문장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전 물리학에서 뉴턴은 우주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빈 공간으로 보았고, 중력을 물체와 물체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달 혹은 사과가 떨어지는 원인을 중력의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중력의 힘을 수치화하여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법칙을 세웠다.
그러나 이 절대적 진리처럼 보였던 과학적 언술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절대적 진리가 아닌 ‘눈앞에 있는 현상을 서술한 하나의 모델'로 격하된다(물론 그렇다고 뉴턴의 법칙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법직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조건에서 정확하게 작동하는지 적용 범위가 더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이 ‘사고 실험’을 통해 뉴턴의 전제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단순히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치 팽팽한 그물망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놓으면 그물망이 휘어지는 것처럼, 거대한 질량을 가진 지구라는 천체가 시공간을 휘게 만든 것이다. 즉, 물체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경로를 따라 흐른다.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이란 힘이 아니라, ‘휘어진 경로’를 따라 흐르는 우주의 결이다.
1.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해야 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정말 그렇게 해야 그런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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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 삶과 비본래적 삶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이냐, 더 좋은 삶이냐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들이 통속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은 매우 추상적이거나 이질적인 경우가 많으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니체나 하이데거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무척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그것을 한 인간이 획득하기엔 벽이 매우 높은 편이다.
좋음과 좋지 않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세워놓은 길을 발견하고, 그 길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제시한 방향성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필요의 순간 훌륭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을 건넨다. 급하게 빠져들기보다 더 많이 고민해보고, 더 오래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머뭇거림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발자취이며, 정답만을 선택하는 삶은 미화된 허구에 가깝다. 차라리 내가 선택한 길이 매우 좋은 길이었다는 걸 깨닫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반대되는 길과 새로운 발견
- 사르트르의 기대와 아인슈타인의 주사위 그리고 양자역학
사르트르는 인생을 하나의 긴 기대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 기대를 넘어 다시 기대를 갖는 실존적 존재 방식을 취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미래를 향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라 보았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기대와 자유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과 동시에 중지되므로 죽음은 인간의 존재 방식인 기대를 차단하는 것이며, 이는 곧 나의 사라짐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달리 죽음을 나와 관련 없이, 외부에서 우연히 나에게 찾아오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라고 보고, 이를 ‘죽음의 우연성’이라 하였다.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인 ‘나’가 사라지면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죽은 나의 삶이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또 다른 주체인 ‘타자’이다.
어떤 청년이 한 권의 책을 쓰고 갑자기 죽었다고 했을 때, 그의 죽음이나 그가 남긴 책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자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부여된다. 이렇듯 사르트르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 나라는 존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죽음은 그 자체로서는 삶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삶과 단절된 상태라고 주장하는 등 죽음은 삶에서 실감 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견해는 죽음을 지나치게 타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나’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고인의 삶은 타자인 나의 시선에서 재구성되므로, 이를 통해 고인과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실존적 삶을 논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이다. 여기서 주체적 태도란 내게 주어진 자유를 발휘하여 스스로 선택을 내리며 그에 대해 후회나 변명 없이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관점은 인간이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스스로 정립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주어진 자유를 발휘하여 스스로 선택을 내리며 실존적으로 살아간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거시 물리학 세계의 특이하고 특별해 보이는 물리 법칙을 발견하고 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큰 오명을 남기고 만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는 우주는 확률이 아닌, 정해진 법칙에 따라 완벽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아이디어(불확정성 원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우주가 본질적으로 결정론적이며 숨겨진 법칙이 있다고 믿었기에 신(우주의 근본 질서)이 무작위적인 주사위 던지기 같은 확률의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를 ‘결정론적 우주관’이라 부르며, 이 의견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예측 가능하고 인과율에 따라 결정된다.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인 ‘나’가 사라지면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죽은 나의 삶이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또 다른 주체인 ‘타자’인 것처럼 양자역학에서는 타자인 관찰자(측정 장치)가 미시 세계를 관측하는 순간 확률 기반의 결과가 발생한다.
사르트르에게 실존하는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기대와 가능성’의 상태이다. 그러나 죽음과 동시에 그 가능성은 차단되며, 고인의 삶은 오직 타자의 시선에 의해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남는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논리는 위에서 한 것처럼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의 원리와 연결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에 머문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실존적 자유’의 물리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인 관찰자(측정 장치)가 이를 측정하는 순간, 수많은 확률로 흩어져 있던 입자의 상태는 단 하나의 결과로 ‘붕괴’하며 결정된다.
즉, 사르트르의 죽음이 나의 자유를 뺏고 타자의 시선 속에 나를 가두는 사건이라면, 양자역학에서의 관측은 입자의 무한한 확률을 걷어내고, 하나의 물리적 실체로 고정하는 사건인 셈이다.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거부했던 이 ‘확률적 세계’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실존적 불확정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우주의 모습이었다.
확정은 종종 나의 바깥에서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인간은 저항의 활로를 얻는다. ‘나’에 대한 확정은 ‘내 안’에서의 반발로,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1.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인 ‘나’가 사라지면 정말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질까? 또한, 죽은 나의 삶이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일까?
2.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까?
3. 죽음은 그 자체로서 삶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걸까?
4. 고인의 삶이 타자인 나의 시선에서 재구성되어야 고인과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5. 인간은 스스로 선택을 내리며 후회나 변명 없이 책임을 져야만 할까?
★ 사르트르 예시처럼 만약 여러분이 죽은 뒤, 누군가 나의 일기장을 발견해 읽고,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진짜 ‘나’에 대한 확정된 규정일 수밖에 없을까?
글은 기본적으로 탐색이며, 인간이 남긴 글은 완벽할 수 없다. 내가 나쁜 발언을 일기장에 쏟아냈다면, 그 일기장은 한 인간의 단면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 사람이 왜 그 발언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환경이 영향을 끼쳤는지, 그 상황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계략이 숨어 있을지, 심지어 그 글 자체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외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이 불명확하게 그 글의 주위를 떠돌고 있다. 비유하자면, 완벽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일기장의 상태는 ‘진실과 거짓’, ‘단면과 전체’가 뒤섞인 중첩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양자역학처럼 관측된 순간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단지 미시 세계에서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보아야 할 것은 텍스트의 ‘불명확성’이다.
미시 세계의 현상은 미시 세계 안에서, 인간 세계의 현상은 인간 세상 안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얼마든지 기록으로 남기고 죽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실존적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며, 단지 그것이 타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낳을 뿐이다. 물론 그가 자신이 결론 내린 의미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면, 많은 타자가 그 의미에 동조할 것이다(반대의 경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해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존재 자체에 의해 의미가 고정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최 – 너희의 삶은 타자에 의해 확정된 결과물(붕괴된 파동함수)가 아니라,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첩 상태야. 그 시기가 지금이 아닌, 그 이후, 그리고 아주아주 먼 이후일지라도.
글을 읽음이란,
1부의 금리는 표면을 읽는 방법이었고(세상의 경제가 돌아가는 현상 파악), 2부의 푸코와 알고리즘은 텍스트 뒤에 숨은 설계자의 의도, 구조 등을 포착하는 힘, 즉 이면을 읽어내는 방법이었다.
마지막 3부는 읽어낸 세계 안에 나의 위치를 정하고, 스스로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힘, 즉 ‘나를 읽는 방법’에 대한 수업이었다.
읽는다는 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삶을 저항적으로 구축하는 주체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 편의 가능성이다.
다음 문학 수업 예고
나이라는 건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돌았는지 기록한 행성 주기에 불과하다. 그건 권력자 혹은 사회가 인간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편의적 발명품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세상은 자꾸만 어린 인간들을 일찍 ‘관측’해서 하나의 결과로 확정 지으려 하겠지만, 우리의 삶은 타자에 의해 붕괴된 결과물이 아니라,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중첩 상태와 같다.
그 가능성이 꽃피는 시기가 지금이 아닌, 그 이후, 그리고 아주아주 먼 훗날이어도 괜찮다. 우리는 그 자체로 이미 우주적 가치를 지닌 ‘현존재’니까.
인간의 가치와 다양성은 시와 소설을 통해 무궁무진한 형태로 분출된다. 시인들의 섬세한 포착과 감수성 풍부한 표현, 아름다운 묘사와 감각적 묘사, 숭고한 의지. 그 안에 함축된 한 사람의 인생 혹은 자연물의 경이로움. 보이지 않는 것을 글자로 표현한 무모하면서도 치명적인 아름다움.
소설가들의 방대한 구조적 설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 때로는 맹렬하게 사회를 비틀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쓰러지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우리의 삶과 닮아 있어 더 비극적이고, 더 자극적이고, 더 통렬한 삶의 지침서. 간접 경험의 정점에 올라 있는 소설.
이 외에도 귀여운 경기체가라거나 격조 높고 우아한 시조, 자유를 머금은 사설시조, 깨달음과 말 놀음으로 점철된 수필들..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살펴볼 순 없겠지만, 대표적인 작품들의 일부분과 대표적 문장들을 다음 수업에서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