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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받았는데 읽지를 못합니다.

제 딸이 그래요.

by 사차원 그녀

어제 직원 회식을 하고 9시쯤 귀가를 했습니다. 학교는 종업식을 앞두고 송별회 시즌입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이별이 너무나 힘든 요즘입니다. 집에 갔더니 남편이 냉장고 청소를 하고 있네요. 그저께 혼자 삐지더니 뭔가 깨달은 것이 있나 봅니다. 반성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가방과 옷을 정리하고 소파에 잠시 기대앉아 쉽니다. 아이고 잠만 자고 또 출근이네. 자기 방에서 부스럭거리던 딸이 종이 1장을 들고 거실로 나옵니다.


“엄마, 이것 좀 읽어 줘.”

“이게 뭔데?”

“원어민 선생님이 자기 내년에 못 만난다고 나에게 편지 써주셨어.”

“야, 너희 반 애들이 28명인데, 이걸 일일이 다 써줬어? 그 열정 대단하시다.”

“아니야, 선생님이랑 친한 애들 몇 명한테만 써주셨어.”


편지의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이 수준을 고려해서 정말 쉽고 간단한 문장으로 써주셨어요. 약간의 흘림체가 몇 군데 거슬리는 거 빼고는 말이지요. 선생님은 첫 소절부터 공부해서 읽으라는 친절한 안내를 남겨주셨지만 급한 제 딸은 숨넘어가기 직전이네요. 제 딸은 편지를 읽을 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 딸은 원어민 선생님과 친할까요? 그건 다 독서부 덕분입니다.


책도 안 읽는 그 딸이 5학년 동안 독서부에 들어가서 활동을 했습니다. 원어민 선생님은 학교 사서 선생님과 친한가 봅니다. 그래서 딸아이가 독서부 활동 시간에 책을 소개하는 발표 내용을 원어민 선생님이 몇 번 참관하셨죠. 미리 캔버스로 일주일 내내 공들여간 시각 자료에 목소리 하나는 커서 발표는 똑 부러지게 하는 딸은 원어민 선생님께 칭찬받았다고 자랑했던 적이 있었네요. 그 이후에도 종종 원어민 선생님께 받았다며 간식 꾸러미를 집으로 들고 와 보여주곤 했습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인사 하나는 자신감 있게 잘한다며 큰소리치던 딸아이.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원어민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영어 공부에는 전혀 뜻이 없는 딸입니다. 본문에도 원어민 선생님이 써 주신 것처럼 딸아이가 원어민 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앞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해요.


“근데, 딸 너도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드릴 편지 써야지. 파파고 번역기 도움이라도?”

“나 벌써 학교에서 편지 써서 드렸어.”

“어떻게? 영어로? 친구가 도와줬어?”

“아니. 한글로 썼어. 선생님도 한국에 계속 계실 텐데 한국어 공부하셔야지.”

“아, 진짜 우리 딸 배려 쩐다. 원어민 선생님 1년 지나서 편지 읽겠네”

“뭐래? 누가 읽어주겠지.”


샤워를 마치고 아껴 놓은 3년 묵은 하모 엽서를 꺼냈습니다. 1년 동안 영어 수업을 함께 해주었던 우리 학교 원어민 선생님께 간단한 인사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저는 읽기는 잘하지만, 쓰기가 약한 관계로 번역기의 힘을 많이 빌렸습니다. 올해 만난 원어민 선생님은 제가 그동안 만났던 원어민 선생님 중에 당연히 손꼽을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을 해주셨어요. 내년에는 다른 학교로 가시면 못 뵐 수 있으니 고마운 마음을 몇 자 적어 보냅니다. 항상 만남은 즐겁고, 이별은 서운한 법이지요. 다들 어디를 가시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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