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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에 줄을 그어보려 했으나

경과를 지켜봅시다.

by 사차원 그녀

꿀광 피부를 자랑하셨던 외할머니 덕분에 엄마도 피부가 좋으시다. 이런 엄마 덕분에 우리 3남매는 사춘기에 그 흔한 여드름도 한번 안 나고 곱게 성장했다. 솔직히 이목구비는 형편없습니다.


오 하늘이시여! 근데 서른 중반이 넘어서 작년 여름에 갑자기 얼굴에 여드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인을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면 산부인과 진료하면서 먹었던 염증 치료 약, 스트레스 정도. 염증 치료 약을 보름가량 먹었는데 증상은 크게 호전이 되지 않았고, 속 울렁거림과 무기력증으로 나는 약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 약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좁쌀 같은 여드름이 양쪽 볼에 1, 2개씩 올라오기 시작했고 당연히 이번에도 곧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오던 여드름이 차츰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는 마스크 없이 민얼굴로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겨울방학 무렵, 나의 영혼의 언니들. 2016년 동학년 선생님들을 만났다. 남편 자랑에 자식 이야기, 기타 등등 신나게 떠들다가 어느 선에 피부 이야기가 나왔다. 한 선생님은 이마 주름이 깊어져 고민이라고 하셨고, 한 분은 목의 쥐젖과 광대에 넓게 퍼진 흑자 이야기를 하셨고, 자연스레 나도 여드름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왕언니 선생님이 본인 중학교 동창 남편이 피부과 전문의로 일하는 피부과에 같이 가보자며 운을 띄우셨다. 평소 나 같으면 돈 아까워서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이번에는 이 여드름과 꼭 작별하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장님이 그랬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아무도 나에게 잘했다고 상을 주지 않는다. 나에게 주기적으로 스스로 선물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도 나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13년 넘게 일하면서 내 돈 주고 피부과를 처음 간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다. 결혼식을 앞두고 피부과도 아닌 피부관리실에 마사지받으러 두어 번 가본 게 다다. 난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를 위해 이 정도 상을 주는 것에 대해 남편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의 고액 지출에 대비해 당당히 나의 비상금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명절 연휴를 무사히 보내고 우리 3인은 피부과 앞에서 만났다. 다들 나처럼 피부과 초짜들이어서 화장품을 어디까지 바르고 와야 하는지 물었지만 내가 답을 알 턱이 없으므로 일단 바르고 싶은 만큼 바르고 와서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지우자고 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귀찮은 나는 스킨만 바르고 마스크를 쓰고 출동했다.


남자 의사 선생님은 대문자 T였다. 그리고 왜 후기 글에 불친절하다고 써 놓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은 나의 큰 기대와 달리 처음부터 사실을 이야기하셨다. 소방관이 불 끄는 상황에 빗대어 나의 여드름 진화 작전을 이야기해 주셨고, 아무튼 결론은 어쨌든 흉터는 남는다는 것이었다. 여드름 치료 약을 1주일 정도 먹고, 다음 주에 상태를 보고 여드름 연고나 내가 원하는 피부과적 관리(?)를 진행할지 의논하자고 하셨다. 여드름으로 얼굴이 쑥대밭이 된 건 불과 한 달가량인데, 원상 복구, 아니 아니 회복에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상상도 못했다.


처방전을 받아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갔다. 약국에서 약을 받는데 약사님이 주의 사항을 알려주셨다.

“약은 꼭 식사하시고 드세요. 그리고 술, 밀가루, 인스턴트 음식은 피하세요. 스트레스도 받지 마시고요. ”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니, 아! 온통 주변이 스트레스 지뢰밭인데.

나는 지금 진료비 만오천 원에 약값 만 원을 소비하고 찝찝한 상태다. 오래간만에 큰돈 쓰고 환골탈태할 꿈을 꾸었는데 우리 딸 말이 맞았다. 얄미운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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