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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재 작가의 수필 '사모곡 思母曲'을 청람 평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모곡 思母曲





수필가 신우재









어머니는 100년 9개월을 사셨다.

1915년 11월생인데 2016년 9월 9일 돌아가셨으니 우리 나이 계산법으로는 102살이 된다. 가는 가지가 잘 부러지지 않은 것처럼 병약한 사람이 오히려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가 그랬다.

어렸을 때 유난히 병고가 많았던 분이었다. 40대에 치아가 다 망가져 의치義齒를 하셨고, 6.25 전쟁 중에 심한 안질로 한 눈이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80대 초반에 가벼운 중풍을 두 번 겪은 후 좀 센 것이 왔을 때 응급처치를 빨리하여 뇌에 큰 손상을 면할 수 있었다.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치매癡呆 등 인지장애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신이 말짱하셨고 언어가 분명하셨다.


임종이 길어지는 것도 본인이나 가족들이 두려워하는 일이다.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지신 뒤 20여 시간이 채 못 되어 임종하셨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전날부터 낌새를 채고 있었기에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집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어머니는 사시던 집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셨다. 사망진단서의 ‘직접사인死因’ 란에는 ‘노쇠사老衰死’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원에서 임종臨終할 경우는 연세가 많더라도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폐렴”이라든가 “심장마비” 등으로 적힌다.


돌아가실 날짜도 마치 택일擇日을 해두신 듯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9월 초순, 아버지의 기일 사흘 전이었다. 어머니의 삼우제가 아버님의 기일이었다. 계산해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이틀이 모자라는 30년을 더 사셨다.


이쯤 열거하다 보니 나의 모친은 임종을 맞는 노인으로는 여러 가지 복을 누리신 셈이다. 어머니의 복이자 자손들의 복이다. 이럴 때 선종善終이라는 말을 써도 좋을 것이다.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다'는 속담이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딱 맞는 말은 아니다. 끝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더 중요하다.

삶은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거나 적어도 견딜 만해야 한다. 고생스럽더라도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많은 노인들에게 노년은 이런저런 병과의 싸움이다. 옛날이라면 그중 어느 한 가지 병으로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술이 발달하고 의료보험이 잘된 이 나라의 노인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자식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머니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다. 중풍이 왔지만 조기 발견하여 뇌에 큰 손상을 입지 않고 수습할 수 있었다. 심장이 약하여 여름마다 고생하시다 심장박동기를 시술施術한 후 한결 나아졌다. 백세를 넘어 사시는데 발달한 의술과 의료체계 덕을 단단히 보신 것이다.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잘 안 들려 텔레비전도 보실 수 없었던 마지막 2년쯤은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왜 이렇게 안 죽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나이에 어머니는 낮잠을 자시는 일이 없었다. 편하게 한 잠 주무시라고 권하면 지금 자면 밤에 잠이 안 와서 고생한다면서 사양하셨다. 말년에 몸이 극도로 피곤하실 때도 앉아서 버티셨다.


순명順命 익히기


몸이 성치 않은 대부분의 노인들이 그러하듯, 어머니도 좋은 약이 있으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다. 이런 믿음을 악용하는 돌팔이들이 노인들이 모이는 전국의 경로당을 돌아다니며 엉터리 약을 팔아먹는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며 시간이 나면 그곳엘 한 번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 여주驪州의 어느 시골이었다. 그곳에 신통력을 가진 의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경로당의 다른 할머니가 큰 효험을 봤다기에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돌팔이일 것이라고 짐작이 갔지만 어머니의 뜻이 간절해서 모시고 그곳엘 갔다. 여주 교외郊外의 한적한 동네에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신통력을 가졌다는 사람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흘끔흘끔 보면서 자기는 분명히 말하지만 한의사는 아니고 단지 자기만의 비방으로 건강식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비방이란 삼백초라는 약초로 만든 즙이었다. 수상쩍었지만 1.5리터들이 한 병을 7만 원을 주고 샀다.


복용법을 설명하면서 빈혈이 있으면 철분이 부족한 것이니 병에 못을 몇 개 넣어두고 복용하면 좋다는 것이다. 그를 수상쩍게 보다가 이제는 돌팔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는 없는지라 조용히 그 집을 나왔다.


돌아오는 차 중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병들이 찾아오게 되어있다, 의사들은 ‘퇴행성’ 이니 ‘노화’니 하는 어려운 말을 쓰지만, 쉽게 말해 80년 가까이 몸을 썼으니 고장이 안 날 수 있느냐, 세상에 노인들의 몸을 다시 젊은이로 되돌리는 그런 약은 없다, 중국의 황제도 그것을 원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노인들은 싫더라도 병과 원수가 되는 것보다는 친구 삼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그 약병을 따지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친척들이나 자식들이 건강을 물으면 “늙은이는 아프게 되어 있잖니. 이제는 병을 친구 삼아 지내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상황파악이 빠른 어머니는 아들의 간절한 말의 뜻을 얼른 파악하신 것이다. 노년을 노년으로 받아들이는 것,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명順命(acceptance)의 경지를 이해하신 것이었다.


감사感謝익히기


어머니는 종교가 없었지만 노년의 어머님은 ‘고맙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아들이 찾아 뵐 때도 “늙은 어미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 ‘, 전화를 걸어도 “전화해 주어서 고맙다 ‘고 하셨다. 용돈을 드려도, 드실 것을 사다 드려도 늘 ‘고맙다’고 하셨다. 심지어 ”건강하다니 고맙다 “, ”잘 있다니 고맙다 “는 식의 표현도 쓰셨다.


세상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달리 보일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어머니의 심신에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년이 되면 어린애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작은 일에 짜증을 내고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흔히 본다. 이런 마음가짐은 본인의 심신을 갉아먹을 뿐이다.


8 순 넘어 홀로서기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셨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는 부모들이 없지만 구세대의 어머니들에게는 그런 바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두 차례 매몰차게 거부했다. 서른이 되어 결혼을 했을 때 부모님들은 단 몇 달만이라도 한 집에서 살기를 바라셨다. 나는 30년 동안 복속했던 두 분의 생활 질서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고부간의 관계란 결코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예 처음부터 그런 소지를 만들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에게도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로 시집살이는 안 시키겠다고 큰 소리로 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결혼한 동생이 잠시 모신 적이 있다. 여동생이 결혼했을 때는 신혼내외가 어머니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았다. 외손녀와 외손주를 학교 갈 나이까지 키워내자 여동생도 이제는 어머니 모시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 했다. 그 무렵 나는 시골에 내려와 살고 있었고, 아내는 사회활동을 계속하면서 주중을 보내고 주말에 시골로 내려오던 시기였다. 나도 아내도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못되었다. 형편도 그렇지만, 아예 그런 의사가 없었다.


나는 8 순을 넘은 어머니를 독립시키기로 작정했다. 나의 생각을 알게 된 어머니는 속으로 무척 섭섭해하셨을 것이다. 또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도 느끼셨을 것이다. 평생 처음 겪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어머니의 집이 있고 그 집에서 따로 사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시게 될 것이라고 그럴싸한 말로 설득을 했다. 또 우리 남매들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들리고 묵어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둘러댔다.


여동생이 사는 개포동 아파트 부근의 12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신혼살림처럼 가구와 가전제품, 그리고 취사도구 일체를 새로 사들 집을 꾸몄다. 가까이 사는 여동생과 두 아들이 자주 들리며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어머니는 전부터 나가시던 아파트 경로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셨다. 할머니들은 아침부터 모여서 점심도 같이 해 드시고 해질 무렵에 헤어졌다. 경로당 행차는 어머니의 일상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 되었다.


어머니는 망설이면서 등을 떠밀려 새 집으로 이사를 가셨다. 법적으로 ‘독거노인獨居老人’이 되신 것이다. 다행히 한 달이 채 안 되어 따로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하셨다. 경로당의 할머니들이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되는 어머니를 모두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들 중에는 더러 새벽부터 경로당으로 나오는 분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그 단지의 30평대 아파트에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데, 새벽부터 출근하는 아들과 며느리, 학교 가는 손자손녀들이 번갈아 드나들다 보면 할머니는 생리문제조차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아침부터 경로당으로 나와 버린다는 것이다.


이웃 아파트에 사는 막내딸이 수시로 찾아뵙고 잔심부름을 했다. 두 아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식사를 준비해 들고 가서 어머니와 식사를 함께 했다. 마지막 2년 동안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어머니와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찾아뵐 때마다 “늙은 에미를 찾아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늘 고령의 어머니를 혼자 사시게 둔 것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시골집에, 아내는 주중에 서울 집에, 아들은 미국 워싱턴 부근에, 며느리는 뉴욕에, 홀몸이 되신 장모님은 암사동 아파트에 각각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1인가구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일찍부터 겪고 있었다.


나의 세대는 부모의 노후를 돌봐드리면서 나의 노후를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샌드위치 세대인 것 같다. 구세대의 막내이자 신세대의 맏이가 된 것이다.


자존감自尊感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좀 색다른 부탁을 하셨다.


“혹시 집에 쓰다 남은 향수 같은 것이 있니?”


“왜요?”


“늙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


그 순간 번뜩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방어 태세가 완전하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받고 피곤한 일인가...


그런 노력 덕분인지 어머니에게서는 그런 냄새를 맡지 못하였다.


돌이켜 보면, 자존감을 지키려는 이런 긴장이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노년에 긴장이 풀어져서 자존감을 잃으면 혼돈이 있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자식들에게 그런 말년을 보여주고 갔는가. 나는 무너지지 않은 어머니의 자존감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그런 혼돈混沌을 보지 못하였다.


보행이 불편하여 지팡이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를 매우 창피스럽게 여기셨다. 부축을 받는 일도 싫어하셨다. 지팡이의 도움으로도 보행이 어려워졌을 때 자식들은 휠체어를 권했지만, 펄쩍 뛰시면서 마다하셨다. 늙고 병든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하시면서 그때부터 외출을 딱 끊었다.


어린 증손녀가 어머니를 보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일이 있었다. 갓난이 시절에는 몰랐지만 조금 커서 사람들을 구분할 나이가 된 증손녀가 할머니를 보고 낮이 설어서 운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일을 두고두고 섭섭해했다.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듯싶다.


장례비를 남기고 가시다


어머니는 큰 아들이 매달 드리는 많지 않은 용돈을 아끼고 저축하셨다. 활동에 부자유가 없던 시절에는 다 쓰셔도 모자랄 액수였다. 통장에 넣고 남은 돈은 친척들이 찾아올 때마다 차비에 보태 쓰라고 쥐어 주었다. 용돈을 받은 친척들은 다음번 어머니를 찾아올 때 어머니에게 선물을 사 오거나 용돈을 드렸다. 결국 비슷한 액수의 금품이 돌고 도는 셈이다. 다만 참가자 모두가 서로 비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게임이다.


자식들에게도 용돈을 주셨다. 가끔 나에게 “요즘 좀 야위어 보인다”면서 돈을 쥐어 주시면서 “내가 좋은 걸 해 먹이고 싶어도 못하니 이 돈 다른데 쓰지 말고 꼭 먹고 싶은 것 사 먹어라”라고 하셨다. 우리 자매들 모두가 이런 용돈을 가끔 받았다.


가실 날이 멀지 않다고 생각하신 어느 날 어머니는 막내딸에게 그동안 모아 둔 돈을 감추어 둔 곳을 알려주셨다. 수의壽衣도 오래전에 미리 마련해 두셨다. 어머니가 모아 놓으신 돈과 은행에 맡긴 돈은 장례식을 치르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우리 내외는 의논하여 조위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하던 막내 여동생이 “오빠, 엄마 둔 봉투가 또 하나 나왔어”하며 내게 내밀었다.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후 나는 가족들에게 그 봉투를 꺼내 보여주며 “오늘 점심은 돌아가신 어머님이 내시니까 푸짐하게 먹어서 돌아가신 분께 감사를 표하자”라고 했다.


왜 이렇게 죽기가 어렵냐


어머니는 100세가 넘게 사시는 것을 욕되게 여기셨다. 말년에 “왜 이렇게 죽기가 어렵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90이 넘으면 방에 누워서 앞산에 누운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말이 있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많이 어두워져서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를 들으셨다. 중풍 후유증으로 머리에 늘 통증을 달고 사셨다. 가족과 가까운 친척, 그리고 낮에 잠시 왔다가는 노인요양사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 지내시는 시간이 많았다. 이런 형편이니 마지막 몇 년은 사시는 것이 몹시 힘드셨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잠에서 깨어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혼수상태였다. 구급차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모셔갔다. 응급실의 수련의들도 혼수상태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연세가 100세라니까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입원실을 내 줄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가까운 의사 친구와 의논하여 그가 잘 아는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요양병원으로 모셔가기로 했다.


요양병원에 입원절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생명연장장치를 달고 사셔야 하는데 그것이 안쓰러웠다. 그 무렵 장모님은 뇌출혈로 1년 이상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여 살고 계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서둘러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병상에 앉아 계셨다. 간호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성깔이 대단하셔요. 새벽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셔서 깜짝 놀랐어요. 왜 기저귀를 채웠느냐면서 당장 벗기고 화장실로 데려다 달라시는 거예요.”


의식이 돌아온 어머님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요양병원에 더 계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어머님을 모시고 개포동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 소동의 원인은 며칠 후 밝혀졌다. 여동생이 어머니에게서 어렵게 알아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10여 년 간 매일 밤 10시쯤 수면제를 한 알씩 드셨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노인들에게 의사가 처방하는 독성이 약한 수면제였다. 사건 전날 어머니는 약을 드시다 갑자기 이 약을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셨다. 약병에 있던 알약을 다 털어 드셨다. 자살기도였던 것이다. 자식들로서는 충격적이고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어머니의 최후의 소망은 “빨리 죽는 것”이었던 것이다. 부모님들이 장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동안 온갖 병원 수발을 다 들어 당신이 힘겹게 생각하실 정도로 오래 사시게 해 드린 것이 오히려 죄를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종善終


그 사건이 있은 후 어머니는 넉 달을 더 사셨다. 건강은 사건 이전과 거의 다름이 없어 보였지만 식사량도 줄고 체중도 줄었다. 가실 날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가족 모두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낮잠을 안 주무시는 어머니가 잠이 드셨는데 코고는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어머님 댁으로 갔다. 여동생을 집으로 보내고 어머니 곁을 지키기로 했다. 그 무렵 뒤늦게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아내가 학교일로 새벽까지 일하다가 나와 합류했다. 어머니의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느 순간 좀 이상하여 주의해 들어보니 숨소리가 안 들렸다. 아주 먼 길을 떠나신 것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되었고, 절차도 생각해 두었으므로 당황할 것도 바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더 이상 하루하루 힙겹게 사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장례식이 다 끝날 때까지 나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친구가 무슨 상주가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면서 표정관리 좀 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가까운 강남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연락하여 운구차량을 보내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 바퀴 달린 들것이 들어오고 내가 어머니 유해를 들어 실었다. 가벼운 이불을 든 것처럼 가벼웠다. 몸에 남은 모든 것을 다 덜어내고 가신 것이다.


부고訃告는 최소화하고 부의금은 받지 않기로 했다. 물론 직장이 있는 아우와 여동생네는 직장 손님이 있어서 은퇴 20년이 되는 나와는 사정이 달랐다.

직장생활을 하는 그들이 받은 부의금賻儀金은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하는 돈이다.


장지葬地는 아버님이 묻혀계시는 동화경모공원에 합장合葬으로 모시기로 했다. 수의는 어머님이 마련해 두신 것을 썼다. 종교가 없는 분이니 목사님이고 스님이고 신세질 일도 없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유교식으로 하루 세 번 고인에게 상을 차려 올리는 일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관을 고르라고 했다.

40만 원에서 250만 원까지 여러 등급이 있었다. 나는 40만 원짜리를 골랐다. 아버님도 탈관 脫棺을 하고 모셨으므로 어머니도 탈관으로 모실 작정이었다. 어차피 탈관 후 태워버릴 물건인데 고가품을 쓸 이유가 없었다. 절약정신이 투철하셨던 어머니도 잘했다고 하실 것으로 믿었다. 장례에서 매장까지, 그리고 삼우제까지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삼우제날 가족들의 푸짐한 점심 식사는 어머님이 남기신 봉투로 해결했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편안한 최후와 좋은 날씨, 순탄한 장례절차 등이 모두 고인의 음덕 蔭德 때문이라고 칭송했다.


어머님의 음덕 때문일는지 모르지만 어머님이 살아계실 적에 자손들은 모두 평안했다. 크게 아프거나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다.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 당신의 복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가장 아끼시던 큰 사위, 친정조카, 기저귀를 갈아가며 손수 키운 외손녀가 차례로 모두 타계했다. 살아서 그 일을 당하셨더라면 큰 충격을 받으셨을 일들이다.


고추 당추 맵다 한들...


말년은 그랬지만 평생의 행로는 험했었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거의 다 그랬던 것처럼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우리 세대의 아들 딸 들은 거의 모두 부모들에 대하여 대하소설을 쓸 분량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야기도 대충 엇비슷하여 미주알고주알 다 적을 가치도 없어 보이기에 대충 요점만 적어놓으련다.


어머니는 황해도 평산 출신이다. 1915년 생으로 동향의 아버지와 동갑이시다. 남궁南宮이란 성을 가진 중농집 5남매의 셋째로 태어나셨다. 위로 언니 둘, 아래도 남동생 둘이 있었다. 아들 선호사상이 강하던 시절 딸만 있던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미움을 받았지만 밑으로 남동생 둘이 잇달아 태어나 복동이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17세에 몰락한 양반집으로 시집을 오셨다.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고갈된 시가에서는 잘 사는 집 규수를 들일 능력이 없어 수더분한 중농집 규수를 데려오기로 한 것이었다. 이른바 낙혼落婚이었다. 시가媤家에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둘, 시동생 하나 등 7명이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오신 지 몇 년 후 일가는 서울로 이주를 했다. 193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작은 셋집에서 이 많은 식구들이 복닥거리며 살았다. 아버지는 총독부 청사에 하급 고용원으로 들어가셔서 공직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신 분이었다. 황해도 산촌에서는 당시만 해도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파격破格으로 여겨졌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다. 시할아버지(나에게는 증조부)였다. 조선왕조말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관직을 가졌던 분으로 나름의 학식이 있던 분이었다.


고적한 노년을 보내시던 시할아버지는 어린 며느리를 이야기 벗 삼아 세상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예의와 범절을 가르치셨다. 천성이 착한 며느리는 시할아버지를 잘 모셨고 하시는 말씀을 늘 귀담아듣고 또 실천했다. 늘 말을 아끼셨고, 말을 꺼내실 적에는 생각을 먼저 하셨다. 남의 말을 함부로 옮기는 일도 없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평생 행실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못 배운 미덕이다. 어머니는 가끔 성깔대로 말을 내뱉는 나를 꾸짖곤 하셨다.


어머니는 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


봉사와 순종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신 어머니였다. 내가 세상 물정을 어렴풋이 깨달아갈 무렵부터 나는 연민과 동정의 시각으로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희생자였고 저항하고 탈출할 드센 기도 없는 분이었다. 시집와서부터 군식구 밥해 먹이는 일을 끝도 없이 해왔다. 서울에 가장 먼저 이주한 까닭으로 황해도 평산의 친척들은 서울에 올라오면 독립해 나갈 때까지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었다. 그런 일은 조카들 치다꺼리, 외손주 손녀들 치다꺼리로 이어져 노년까지 계속되었다.


결혼을 할 나이가 되면서 나는 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아 배우자를 찾게 되었다. 봉사와 순종보다는 자주성과 개성을, 전업주부형보다는 능력과 개성을 발휘하여 사회적 역할을 하는 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한 여성을 이상적인 아내감으로 여기게 되었다. 결혼은 내가 부모의 전통적 질서에서 탈출하여 독립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내 배우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처음부터 아내를 시집살이시키지 않겠다고 작정을 했고, 아내감을 만났을 때 이를 약속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아내의 사회적 활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셨다. 훗날 아들이 먼저 은퇴하여 며느리가 가계를 도맡아 운영하게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아내를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고 치켜세우셨다.


고부간의 갈등은 거의 없었지만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와 아내의 시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남남으로 만난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30년 간 가족사를 함께한 어머니와 아들의 시각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노년 뒷바라지를 내가 맡고 나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9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중 5명을 잃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을 잃고 나서 누님과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우와 누이동생이 태어나기 전 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잃었다. 모두 한국전쟁 중에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의 유산


어렸을 때 어머니는 “너는 큰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외가 쪽을 많이 닮았다는 표현으로 ‘외탁을 했다’는 표현을 쓰셨다. 친가 쪽은 몸집이 다소 작고 허약한 편이었는데 외가 쪽을 닮아 골격이 큰 편이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남북이 갈려 다시 만나보지 못한 두 남동생을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큰 외삼촌은 내가 다섯 살 때인가 징용에서 풀려 고향으로 가다가 잠시 누님을 만나러 우리 집에 들렀을 때 만났었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6.25 때 인민군 장교복을 입고 서울까지 왔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어머니는 큰 아들인 나를 특히 끔찍하게 생각하셨다. 가난한 살림에도 비린 것 좋아하는 아들을 부지런히 거두어 먹이셨다. 비교적 튼튼한 유전자를 주시고 건강하게 키워주신 것을 어머니에게 감사드려야 할 것 같다.


자존심이 강한 것도 내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이다. 남에게 약점이나 허점을 보이기 싫어한다.


나를 평생 취미인 자생식물사랑으로 처음 이끌어 주신 것도 어머니였다. 충청남도 청양의 산골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시절,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산으로 나물을 채취하러 다니셨다. 직업적인 채취꾼의 일이 아니라 야산 산책에 가까웠다. 도라지, 잔대, 고사리, 취 등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챙기고 없으면 말고 식이었다. 식물이 갖는 아름다움에 눈을 뜬 것은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신우재 작가의 수필 「사모곡 思母曲」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과 진실이 담긴 한 편의 서정시이자 철학적 성찰을 담은 회고록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는 단순한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 가족의 관계, 노년의 고독, 죽음의 존엄성,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효심은 그의 철학적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으며, 이러한 점들이 수필 속에서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다.


「사모곡」에서 드러나는 가장 강렬한 주제는 바로 신우재 작가의 깊은 효심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겪은 긴 세월의 고난과 병고를 회상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한 고통의 나열로 그치지 않고, 어머니가 보여준 자존심과 존엄성에 초점을 맞춘다. 어머니의 삶은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격동 속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머니상일지도 모른다.

신우재 작가는 그러한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넘어서,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특유의 강인함과 자존심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100세를 넘기며 여러 차례 병고를 겪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휠체어를 거부한 어머니의 모습은 단순한 고집으로 비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자신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이는 신우재 작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단순히 자식으로서의 효심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왜 이렇게 죽기가 어렵냐”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생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그 끝마무리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존경하고, 그러한 모습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찾고자 한다. 이는 그가 부모를 돌보는 일을 단순한 효도 이상의 철학적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示唆한다.


「사모곡」에서 신우재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단순한 상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죽음을 하나의 선종善終, 즉 아름답고 복된 마무리로 바라본다.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세상을 떠났을 때, 작가는 슬픔보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은 어머니가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安堵이며, 동시에 자연스러운 생의 순환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철학적 태도를 반영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어머니가 100세가 넘도록 살아오면서 겪은 병고와 고독은, 단순히 연로한 노인의 고통이 아니라,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과정임을 인정하게 만든다.

이는 작가가 노년의 삶과 죽음을 자연스러운 순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회피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작가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선종'으로 표현한 것은 어머니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點綴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감내堪耐하며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켜낸 삶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과는 상반된 철학적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의 어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작가는 효심을 단순히 부모를 돌보는 행위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독립을 결정하고, 80세가 넘은 어머니를 홀로 살아가게 하면서 그 효도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어머니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독과 그로 인한 내적 성숙은, 단순히 자식에게 의존하는 노년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깨달음을 제공한다. 작가는 어머니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효도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효도와 개인적 독립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를 극진히 돌보면서도, 어머니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러한 태도는 부모를 돌보는 일에 있어 단순히 보호와 돌봄이 전부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암시한다.


「사모곡」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어머니가 말년에 자주 사용하셨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가 그녀의 심신을 평온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한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어머니는 노년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평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가 어머니의 삶을 더욱 존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그 자신도 그러한 태도를 배우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효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고난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신우재 작가의 「사모곡」은 단순한 효도의 이야기를 넘어서, 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부모를 대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아낸다. 효심은 단순히 부모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작가는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어머니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감사와 순명, 그리고 자존감의 유지—를 강조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우재 작가의 철학적 성찰과 효심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선사하며, 우리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사모곡」은 단순히 한 사람의 효심과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대 간의 관계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 이해, 그리고 화해를 담아내고 있다.

신우재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풀어내며, 세대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어떻게 관계를 더 깊고 의미 있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희생을 단순히 영광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삶이 전통적인 가족 제도와 남녀 역할의 희생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부터 배우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간다.

작가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어머니의 전통적 역할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자신의 아내와는 상호 존중과 독립성을 중시하는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세대 간의 변화와 가치관의 전이轉移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우재 작가는 어머니와 아내, 두 세대의 여성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어머니 세대의 희생과 헌신을 존중하면서도, 아내 세대의 독립성과 자아실현을 지지하는 작가의 모습은, 세대 간의 갈등을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는 단순히 한 가족 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충돌과 적응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다시 발견한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았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성이다.

어머니의 삶을 회상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는 가족의 역사가 곧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머니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작가는 어머니가 보여준 자존심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자신의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 한다.

이는 작가가 단순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차원을 넘어, 그 사랑과 가르침을 통해 자신만의 철학적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신우재 작가는 어머니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삶의 모든 부분이 자신의 삶과 철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자존심, 독립심, 감사의 마음, 그리고 순명에 대한 태도는 작가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그를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다.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은 작가의 내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는 죽음이 단순히 소멸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흔적과 기억을 통해 계속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우재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녀가 남긴 삶의 가치와 철학을 자신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과 인간관계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신우재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효심과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더 나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큰 교훈을 준다.




2024. 8. 25. 일




ㅡ 청람 김왕식









신우재 작가님께,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김왕식 인사드립니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작가님의 수필 「사모곡 思母曲」을 읽고 나서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감정의 물결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작가님의 글이 제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제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사모곡」에서 작가님이 보여주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존경은 그저 단순한 회고나 추모를 넘어서,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머니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특별히 되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가님은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나치는 어머니의 존재와 그 무게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100세가 넘는 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 긴 시간 속에 깃든 수많은 순간과 사연들이 제 마음속에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부모님을 모시며 지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부모님의 삶과 그들의 노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해왔습니다.

작가님이 어머니의 삶을 차분하게 풀어내는 그 과정에서, 저는 부모님께서 그 긴 세월 동안 겪으신 고난과 시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하셨던 존엄성과 자존심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셨다는 부분은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퇴해 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을 보아왔고, 그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작가님께서 묘사하신 어머니의 자존심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가족들을 배려하며 마지막까지 품격을 지키려 하셨던 모습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건강을 잃고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걸어가실 때, 가족들이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은, 그 자체로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이렇게 죽기가 어렵냐"며 자신의 긴 생애를 회고하셨을 때, 그 말씀이 주는 무게감은 저에게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한 분이 느끼는 생의 무게이자, 그 안에서 피어난 고통과 쓸쓸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내야 했던 삶의 결실이었습니다.


작가님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담담하게 받아들이신 그 순간들. 그 순간에 작가님은 슬픔을 표출하기보다 오히려 어머니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사실에 안도하셨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상실로만 여깁니다.

작가님은 그것을 하나의 여정의 마무리, 즉 선종(善終)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받아들이며, 그녀의 삶을 복된 마무리로 기억하려는 작가님의 태도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는 부분도 저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세상을 감사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그 마음가짐이 그녀의 심신을 평온하게 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어머니의 그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 우리에게 감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일들에 감사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해 주신 점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작가님께서 어머니의 독립을 결정하셨던 순간, 그것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을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80세가 넘은 어머니를 홀로 살게 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독립하시고 나서 그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는 장면에서는,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 내리는 결정이 꼭 부모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자식들에게도 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언젠가는 부모님이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작가님의 이야기가 저에게 큰 지침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저는 문득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과 헌신, 그들의 고독과 고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이 어머니를 회상하며 풀어낸 이야기는 저에게 단순히 감동을 넘어서, 제 자신의 삶과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작가님,

이 글을 통해 저는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인생의 여정을 존중하고, 그들이 지닌 자존감을 지켜드리며, 그들의 마지막 여정을 평안하게 지켜볼 수 있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도 언젠가는 작가님처럼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아야 할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 글을 떠올리며, 그 순간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저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의 사랑과 고통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또한 부모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들을 더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글이 저에게 큰 위로와 깨달음을 주었듯이, 이 글을 읽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주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작가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글을 써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청람 김왕식 드림





수필가 신우재


1943.

서울특별시 출생

1965~1970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1961~1965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1958~1961
경복고등학교

경력사항

컨벡스코리아 상임고문
2002
경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1998.9~2001
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초빙교수
1997.8~1998.2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1996.7~1997.8
한국언론연구원 원장
1988~1996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실 공보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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