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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청람 김왕식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김왕식






가을이 성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속도는 무심하게 빠르고, 그 흔적은 참으로 잔잔하다. 아직은 한낮의 불볕이 달아나지 못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지만, 그 뒤에는 분명히 가을의 손길이 있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변함없는 녹음으로 우리를 반긴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그 푸르름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이 단단한 나무 앞에서 계절의 흐름마저도 잊게 된다. 소나무의 푸름은 오히려 가을의 도래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기도 한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는 오히려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 무던한 소나무들이 그토록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가을의 첫 신호를 전한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익어가는 보리들의 속살은 어느새 팽팽해졌다.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그 속에는 옛날이야기 하나쯤 담겨 있을 법하다. 그러고 보면, 가을이란 건 자연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무엇이든 잘 익어가는 계절이 아닌가. 잊힌 기억들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다시금 되살아나곤 한다. 초록의 여름이 물러가는 길목에서 그런 생각들이 종종 스쳐간다.


여름은 그토록 지칠 줄을 모른다. 오래된 친구처럼 마지막까지도 우리를 놓지 않으려 한다.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며 나를 향해 비웃듯 웃어댄다. 이마저도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바람마저도 서늘해지고, 여름은 자신의 퇴장을 준비한다. 문득, 나도 모르게 가을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운 그 계절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바란다.


이젠 차가운 바람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은 부드럽고 얇은 바람이지만, 그 안에 가을의 기운이 섞여 있는 것이 느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여름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채워진다. 몸에 달라붙던 더운 그림자들이 이제는 내 발밑에 엷게 깔리며 멀어진다.


가을은 참으로 조용한 계절이다.

여름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르게 가을은 침묵을 깨며 서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그 느긋함이야말로 가을의 매력이 아닐까. 여름의 끈적임과 분주함을 뒤로하고, 가을은 한 걸음씩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침묵 속에는 결코 비어 있지 않은 풍요로움이 담겨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뭇가지 끝에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눈에 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밟을 때마다 그 바스락 거림이 내 마음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바닥에 깔린 낙엽들을 밟는 그 순간마다,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깊이를 음미하게 된다. 붉고 노란 단풍잎은 마치 우리에게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반추하라는 듯 속삭인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가을의 깊이를 음미하는 것도 이 계절이 주는 큰 선물이다.


우리는 그저 가을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 기다림은 어쩐지 안락하고 편안하다. 어떤 이들은 가을의 서늘함을 두려워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더 깊이 숨을 쉬며 마음을 담는다. 계절의 흐름은 언제나 그랬듯 우리의 삶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번 가을도 그러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유난히 밝고 선명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다.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며 밤은 점점 깊어가고, 우리는 그 별빛 아래에서 가을의 무르익은 정취를 만끽한다. 옷깃을 여미고 조용히 앉아 가을의 밤을 음미해 본다. 이 정적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잊고 지낸 감정들이 고개를 든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해 간다.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이제 그 문을 열 준비를 할 때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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