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Aug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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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가을
청람
여름의 끝자락이다.
혹서酷暑가 기세를 떨치며 땅과 사람을 덮쳐 오던 때, 그저 숨죽이며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처서處暑라는 절기를 마주하고도, 기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나무 잎사귀에 내려앉고, 더위에 지친 이파리들은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심지어 지붕 위로는 태양의 열기가 맴돌며, 살갗을 지치게 하는 무더위가 지속되었다.
“살인 더위다.”
이 표현만큼 그 무더운 날들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공기가 마치 무게를 지닌 듯 느껴지고,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올라오는 기분.
여름의 잔혹함에 지친 몸과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오늘 아침,
모든 것이 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것은 더 이상 찌는 듯한 더위가 아니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건 이질적이면서도 낯익은 감각이었다. 서늘한 기운.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듯한 반가움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순간에 여름은 밀려나고 가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여름의 무게감에서 벗어난 바람은 가벼웠고, 그 바람 속에는 상쾌한 냉기가 섞여 있었다.
밤 사이에 이뤄진 변화인 것만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기 중에는 더위의 잔향이 가득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이 매달리는 듯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가을이 나를 덮어주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자연스럽게 두 손을 옷소매에 문질렀다. 피부에 닿는 감촉은 시원하고 상쾌했으며, 그 기운은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나무들도 이 기운을 느낀 듯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위에 늘어졌던 잎사귀들이 다시금 생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가을의 전령이라 할 수 있는 귀뚜라미 소리였다.
그 소리는 작고 은은했지만, 나에게는 분명하게 들렸다. 여름이 아무리 길어도, 자연은 자신의 리듬을 따라 변화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듯한 소리였다. 여름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순간에도, 가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 그 첫 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귀뚜라미 소리는 소박하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마치 이 소리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도 되는 듯, 내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계절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일어났다.
가을은 언제나 나에게 특별한 계절이었다. 여름의 뜨거움이 끝나고, 차분하고 온화한 시간이 찾아오는 이 시기는 나에게 쉼과 성찰의 시간을 허락해주곤 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느려지고, 자연은 자신을 정리하며 다시금 평온함을 찾아간다. 나무는 서서히 잎을 물들여가고, 하늘은 점점 더 높아지며 푸르러진다. 그러한 변화를 느끼는 것은 단순한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과 같았다.
이 가을이 찾아오면서,
문득 지난여름을 돌아보게 되었다. 더위 속에서 버텨온 나날들, 그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의 나의 고민과 고통. 하지만 이제 그것은 모두 지나갔다. 가을은 마치 나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듯했다.
"이제 괜찮아. 이제는 쉼을 얻을 수 있어."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내 몸을 감싸고,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 속에는 여름 동안의 뜨거움과 피로가 섞여 있었고, 이제 그 모든 것을 놓아줄 시간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을이 나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 지난여름의 고통과 더위는 가을의 서늘함 속에서 점점 잊히고 있었다.
아침의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다시 한 번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새로운 계절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번 가을에는 어떤 변화와 성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가을은 항상 나에게 위로와 성찰의 시간을 허락해 준다는 것이다.
이번 가을도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늘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마음을 정리해 왔다.
이번 가을도 그렇게 나에게 찾아와, 내 삶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