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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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 빠진 사발에 탁주 한 잔
청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선술집 안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다.
빗소리는 지붕 위에서 부서져 내리며, 낡은 목재 문틀을 따라 리듬을 타고 울려 퍼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두 명의 사내는 빗방울에 흠뻑 젖은 채로 바지단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였다.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주름진 얼굴과 살짝 희끗해진 머리카락이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선술집 안쪽에는 작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군데군데 거나하게 취한 술객들이 흥성거린다.
구석진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았다. 사내 하나가 손을 들어 가게 주인에게 외쳤다.
“빈대떡 하나,
탁주 한 병 주소!”
주인은 익숙한 듯 손놀림으로 빈대떡 반죽을 뒤집고, 탁주 병을 꺼내어 그들의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빈대떡이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식욕을 돋웠고, 구수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첫 잔을 따르고, 둘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건배했다.
“그래,
이 놈아.
이렇게 또 마주 앉게 되는구나.”
한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내도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인생이 뭐 있냐.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는 게
다행이지.”
그들의 잔은 반짝이며 부딪혔고, 그 소리는 가을비 소리와 어우러져 잔잔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이빨 빠진 사발에 탁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사내들은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좁은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기억부터, 청춘 시절 방황하던 나날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굴곡들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이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날에는 그저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털어놓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잔은 점점 더 자주 비워졌고, 빈대떡도 어느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졌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선술집의 작은 창문을 통해 빗줄기가 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 사내가 말했다.
“비도 오는데,
좀 걸어볼까?”
다른 사내는 머뭇거리며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어차피 젖은 김에
더 젖는 거지.”
둘은 선술집을 나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젖은 거리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깨동무를 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듯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잎사귀들이 빗방울에 젖어 반짝였고, 거리의 불빛은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말없이 걷다가, 가끔씩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내면 웃음이 터졌다.
“옛날에는
우리가 이 거리를 얼마나 많이 뛰어다녔는지 알아?”
한 사내가 말했다.
“그땐 이렇게 비가 오면 도랑에서 물놀이하던 생각이 나네.
이젠 그럴 기력도 없지만.”
그러자 다른 사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기력이야 없어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
오늘처럼 이렇게 비 맞으면서 걷는 것도, 옛날의 우리와 다를 게 뭐 있어?”
그들은 비 속에서 한참을 걸었다.
때때로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차가움조차도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졌다. 몸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마음만은 맑아졌다. 중년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친구와의 시간, 그들이 함께 하는 순간은 언제나 청춘이었다.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들은 그렇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잃지 않을 무언가를 확인하며 걸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확고했다.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온 세월 동안 함께 나눈 우정은 그렇게 가을비 속에서 더욱 짙어졌다. 빗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고, 그들은 마치 어릴 적처럼 자유롭게 비를 맞으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길을 걸어갔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는 몰랐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걸으며,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을비는
멈출 줄 모른다.
추적추적 내리는 길 위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