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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한국의 아버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24. 2024











                    나의 아버지, 한국의 아버지





                                       청람 김왕식






한국의 아버지는 늘 고난의 상징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라를 빼앗긴 채로 세상에 나왔고,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수탈을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전부 일본어였고,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매질을 당하거나 잡혀가는 일이 빈번했다. 집안은 가난했다. 나라를 빼앗기니 생활의 기반은 무너졌고, 가족들은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손에 농기구를 쥐고 일하러 나서야 했고,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해방이 왔을 때 아버지는 잠시나마 희망을 느꼈다. 마침내 조선이 독립을 되찾았으니 이제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은 곧 분단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아버지는 다시 총을 들고 싸움터로 나가야 했다. 동족끼리의 처절한 싸움이었고, 국토는 전쟁으로 두 동강이 났다. 전쟁이 남긴 것은 수많은 죽음과 폐허, 그리고 깊은 상처였다. 가족들은 흩어지고, 집은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버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폐허가 된 국토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먹을 것, 입을 것, 지낼 곳 어느 하나 넉넉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보릿고개를 넘지 못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살아가야 했다. 농사를 짓지만, 흉작이 반복되었고, 땅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보리밥 한 그릇도 귀했다. 아버지의 가족은 간신히 죽을 끓여 목숨을 이어갔다. 보릿고개는 아버지에게 잊지 못할 굶주림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몸이 부서질지언정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떠밀었다.

결국 아버지는 선택을 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먼 이국 땅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독일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끝없는 굶주림과 고통의 연속이었기에,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아버지는 낯선 나라 독일로 건너가 땅속 깊은 탄광에 들어갔다. 탄광 속에서의 일은 생각보다도 더 참혹했다. 갱도가 무너질 위험 속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거친 땅과 석탄 먼지가 아버지의 폐를 뒤덮고, 쉴 새 없이 몸을 혹사시켰다. 고향의 햇빛과 공기를 그리워했지만, 아버지에겐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일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모아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이제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했다. 이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다시 한 번 산산조각이 났다. IMF 외환위기가 아버지를 덮쳤다. 평생을 일구어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의 노력은 또다시 헛된 것으로 돌아갔다. 노년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일해야 했다. 이미 몸은 쇠약해졌고, 건강은 무너졌지만, 가족을 위한 그의 책임감은 여전히 굳건했다.

 시대는 냉정했다.
아버지가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의 기억은 점차 잊혀 갔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고생하며 키워낸 자식들이지만, 이제는 그들마저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쇠약해졌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결국 그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요양원에서의 삶은 아버지에게 있어 더욱 큰 고통이었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는 외롭게 남겨졌다. 몸도 마음도 모두 무너졌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찾아오면서 아버지의 삶은 더욱 처참해졌다.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은 아버지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자식들은 이제 더더욱 아버지를 외면했다. 아버지는 혼자 남아 고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사무쳤다.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결과가 이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인생은 8할이 고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잃고,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굶주렸으며, 결국 타국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경제적 위기와 팬데믹까지 겪으며 아버지의 정신과 육체는 모두 무너졌다.
 
 요양원에서 쓸쓸히 남은 생을 마감해야 하는

한국의  아버지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비극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온몸을 바쳤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고통과 외로움뿐이었다. 희생과 헌신이 빛을 발하기보다는 고립과 무관심 속에서 잊혀 갔다.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임종 앞둔 파독 광부 한국의 아버지




나는 이제 내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 내 몸은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내 마음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어왔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지난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내 인생이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어릴 때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나라가 없던 시절, 우리는 그저 왜놈들의 지배 아래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야 했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배고픔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다. 부모님은 나를 제대로 돌볼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의 나는 그저 배고픔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비좁고 허름했고,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한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함께였기에 그 고통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은 우리의 기쁨을 잠깐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전쟁이 터졌다. 형제들이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하는 비극 속에서 나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야 했다. 총을 쥐고 싸워야 했지만, 이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쓰러지고, 내가 지켜야 할 이 땅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내 마음속의 상처는 너무나도 깊었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다시 내 가족을 위해 살아야 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굶주렸고, 밥 한 끼를 위해 몸부림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때 나는 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굶주림과 싸워 이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버거웠다. 아무리 농사를 짓고 일을 해도,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온 국민이 그렇게 굶주림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가족을 위해 독일로 떠났다. 낯선 타국 땅에서, 나는 다시 나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탄광 속에서 매일 생사의 경계를 오갔다. 그곳은 지옥과도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캐고, 석탄 먼지가 폐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했고, 무엇보다도 내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내 몸이 얼마나 상했는지는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나는 이미 몸을 다 망가뜨렸고, 더 이상 젊은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제 살만한가 생각했다.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구나, 이제는 내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생겼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 외환위기가 우리를 덮쳤다. 평생 일구어 온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땀과 피로 이뤄놓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노년이 되었지만,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친 내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만, 나는 가족을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갔다.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내 자식들만큼은 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이제 나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 바빴고, 나는 점점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슬펐지만, 나중에는 그저 체념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삶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나는 더 깊은 고립 속에 갇혀버렸다. 이미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나는 더 이상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지냈다. 요양원의 작은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이렇게 혼자 남아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믿기지 않았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홀로 남아야 하는구나. 그 생각에 매일같이 눈물이 흘렀다. 나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토록 애써왔던 모든 것이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이제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나의 몫이었고, 나는 그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 같은 아버지들이 겪었던 그 수많은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다음 세대는 그 고통을 기억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다. 내가 평생을 헌신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비록 그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고, 내가 이곳에서 홀로 남았을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내 자식들, 그리고 이 나라가 내가 겪었던 고통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는 떠날 준비가 됐다. 나의 긴 인생이 끝나가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나와 같은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기를, 그리고 그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파독 공부 아버지의 아들이

임종 앞둔 버지께  바치는 글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슬픕니다. 아버지가 평생 겪으신 고통과 희생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 제가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너무 늦게, 너무 늦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아버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늘 강하다고 생각했어요. 늘 가족을 위해 애쓰시고, 묵묵히 일하시며 한 번도 자신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언제나 저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고,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어요.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견디셨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으셨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저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 계셨고, 언제나 저희를 지켜주시는 든든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단순히 한 가정을 이끄는 아버지의 삶만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한국의 역사 그 자체였고, 고통과 희생의 연속이었어요. 제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나라를 잃고, 전쟁을 겪고, 굶주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오셨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그런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하셨던 일들이 이제야 하나하나 기억납니다. 항상 일터에서 늦게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요. 저는 그때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지쳐 보이셨는지 잘 몰랐어요. 아버지는 집에 오셔서도 쉬지 않고 뭔가를 계속하셨어요. 그때 저는 그저 아버지가 바쁘신가 보다 했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 모든 것이 저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이었다는 것을요.

독일에 가셔서 힘들게 일하셨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 저는 그 이야기가 그저 아버지의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땅속 깊은 탄광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셨던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도 몸이 점점 쇠약해지셨는데, 저는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어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몸은 그때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던 거였죠. 아버지는 그 모든 고통을 홀로 감당하셨고, 저희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희 자식들은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실 거라고만 믿고, 아버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아버지와 멀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외면하고 말았어요. 그것이 제일 후회스러워요. 아버지께 더 많이 다가가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제 자신이 너무 미워요.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절망하셨는지 저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을 때, 아버지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에 빠지셨겠죠. 하지만 그때도 아버지는 저희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또다시 힘을 내서 가족을 위해 일하셨죠. 아버지의 그 노력이 얼마나 크고 무거웠는지,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덮쳤을 때,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립감을 느끼셨을까요. 요양원에 계시면서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저희가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아버지를 돌보지 못한 시간들이 너무나 죄스럽습니다. 아버지께서 홀로 남아 세상을 바라보시며 느끼셨을 그 외로움과 슬픔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고독 속에서 얼마나 아프셨을지, 그 고통을 저희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를 보내드리려 합니다. 아버지께서 겪으신 그 모든 고통과 희생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아버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사랑은 늘 무언의 희생으로 표현되었고, 우리는 그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그 사랑과 희생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온몸으로 버텨내신 그 고통과 헌신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삶을 기억할 것이고, 그 사랑을 평생 가슴속에 간직할 거예요. 아버지의 희생은 저희에게 있어 가장 큰 유산이자, 평생 잊지 못할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평안히 떠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아버지도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화롭게 쉬셔야 할 때입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이제는 저희가 대신 안고 갈 테니, 아버지는 그곳에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자식 드림.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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