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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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에 내리는 마음
텃밭 한켠에 보리가 자란다. 늦가을,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나뭇잎이 무성히 떨어진 자리에 조용히 뿌리를 내린 보리. 부모님께서 어린 시절 심으셨던 그 보리밭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손끝으로 흙을 만지던 그 따스함, 바람결에 흔들리던 초록의 물결. 이제는 그 기억을 따라 조심스레 서너 평의 땅에 보리를 심었다.
보리는 강하다. 땅이 얼어붙고 서릿발이 내려도 꺾이지 않는다. 추위 속에서도 푸른 숨을 이어가는 그 생명력은 놀랍다. 울타리 주위에는 벚나무, 갈참나무, 소나무들이 저마다의 잎을 떨구어 낙엽이 되었다. 그 낙엽들이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 보리밭을 덮는다. 자연이 자연을 감싸 안는다. 바람결에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는 보리의 숨결을 지켜주는 자장가 같다.
시인 함형수가 보리밭 옆 무덤가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했던가.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생명을 심는다는 것은 그리움과 다르지 않다. 올봄, 푸르게 올라올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지저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파란 물결이 일렁이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나는 작은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마음의 창이 어느새 푸른 하늘에 머문다.
보리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마치 삶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낙엽이 쌓여도, 바람이 불어도, 보리는 자란다. 그런 보리를 바라보며, 나 또한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씨앗을 심는다. 따뜻한 봄날, 보리가 푸르게 자라듯 나의 작은 다짐도 싹을 틔우길 바라며.
그리움과 기다림이 어우러진 이 작은 보리밭은 어느새 마음속 풍경이 되어 고요히 물결친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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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서늘한 바람결 따라
텃밭 한켠 흙을 적시네
부모님의 숨결 따라 심은 보리
낙엽 이불 덮고 숨 고른다
서릿발에도 푸른 숨을 쉬며
갈참나무 벚나무 잎새 내려와
보리밭 품에 안긴다
고요한 기다림 속 작은 생명 흔들린다
봄날, 종달새 노래 따라
푸른 물결 일렁이는 보리밭
마음의 창도 하늘로 열려
그리움도 바람도 함께 날아오른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