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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 틈새에 돋아난 청보리 ㅡ 자연인 안최호

김왕식







서릿발 틈새에 돋아난 청보리





겨울의 끝자락, 찬 바람이 스며든 들판 위로 서릿발이 엉켜 있다. 그 차가운 틈새를 뚫고 고개를 내민 청보리 한 줄기. 그 연약한 잎새는 겨울의 찬 기운을 마주하고서도 조용히 흔들릴 뿐이다. 미풍에 살랑이며 몸을 맡긴 청보리의 모습은 마치 고단한 하루 끝자락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여인의 뒷모습을 닮았다. 땀에 젖은 옷자락을 털어내고, 굳은 손으로 눈가를 쓱 훔치던 그녀의 모습.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처럼 청순하고도 단단한, 그 고요한 숨결이 떠오른다.

굳게 얼어붙은 땅 위에서도 청보리는 미세한 바람에도 유연히 몸을 맡긴다. 마치 삶의 무게에 눌려도 다시 일어서는 여인의 모습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그녀의 굳은 손길은, 서릿발을 헤치고 돋아난 청보리의 고집스러운 생명력과 닮아 있다. 삶의 고단함이 깊게 스며든 얼굴, 하지만 그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작은 희망. 눈밭을 뚫고 피어난 복수초처럼, 청보리는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며 말없이 속삭인다. "조금만 더 견뎌요, 봄은 오고 있어요."

밥상 앞에 앉아도 목을 넘기기 힘든 저녁, 불 꺼진 방 안의 적막함마저도 싸늘하게 감돌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친 어깨를 조심스레 펴고,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차가운 마음 한켠에 작은 희망 하나를 품고서.

청보리의 여린 잎새는 말한다. 차디찬 바람에도, 굳은 땅에도 꺾이지 않겠다고. 작은 몸짓이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생명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여인이 홀로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봄은 멀어 보이지만, 결코 오지 않는 계절은 없다.

눈발 사이로 스며드는 노란 복수초와 돌틈에서 피어나는 새싹이 그렇듯, 삶도 그렇게 조금씩 틈을 내고 피어난다. 여인은 스스로를 다독인다. 무거운 하루 끝에서도, 차가운 바람 한가운데서도. 그 희망은 작지만 단단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청보리의 잎사귀처럼, 여인의 마음에도 봄이 머물기 시작한다. 봄은 이미,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오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안최호의 글 '서릿발 틈새에 돋아난 청보리'는 자연의 섬세한 변화와 인간의 삶을 조화롭게 연결하며,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겨울의 끝자락, 서릿발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나는 청보리의 이미지를 통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그 안에서 희망과 인내의 메시지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특히, 차가운 겨울과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겹쳐 표현한 서사는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복수초와 청보리라는 자연의 이미지는 희망과 생명의 의지를 상징하며, 이를 통해 ‘봄은 반드시 온다’는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안최호의 시선은 삶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태도를 일깨워준다.

또한, 담담하고도 섬세한 문체는 독자에게 자연스레 스며들며, 마치 겨울 끝자락의 찬 바람 속에서도 어딘가에서 봄이 싹트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지 않은 표현 속에서도 생명력 넘치는 청보리의 이미지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진실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안최호의 글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글로 풀어내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그의 글은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묵직한 성찰을 안겨준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틔운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긴, 울림 깊은 작품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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