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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 자전거에 실린 시간의 향기

김왕식







두 발 자전거에 실린 시간의 향기







김왕식





장호권 전 광복회장과의 차담茶談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와도 같았다. 백발이 성성한 그의 모습은 단순히 나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 같았다.
훤칠한 키에 매끄러운 백미白眉와 흰 얼굴, 그리고 온화한 미소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을 보는 듯했다. 그의 외모와 태도는 단순히 외형적 매력을 넘어, 세월의 품격과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의 첫마디는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평생 좀처럼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만 인상적이었다.
“너무 바빠서 감기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단순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말에는 바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특유의 유머 감각이 담겨 있었다.
이는 그의 삶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말한 ‘바쁨’은 단순한 시간적 과부하가 아니라, 그의 존재 이유와 민족의 사명을 위한 치열한 활동의 결과였다.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장준하 선생이었다. 이런 배경을 지닌 그와의 대화는 단순한 개인적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의 주제는 ‘사상계思想界'복간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예상외로 참신하고 열려 있었다. 대화 중간중간 그는 진지함과 유머를 절묘하게 섞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의 유머는 상대를 편안하게 했고, 날카로운 통찰력은 대화의 깊이를 더했다. 그의 살짝 지어진 미소는 한 사람의 매력을 넘어, 인간적 품격이 무엇인지 느끼게 했다.

우리는 소박한 된장찌갯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골 어머니가 차려준 듯한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화려함 대신 진정성을 택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민족을 위한 그의 바쁜 행보는 화려한 도시의 중심이 아니라, 따뜻한 시골의 향기 속에서 더욱 빛났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별명은 두 발 자전거입니다.”
처음엔 이 말의 의미를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어서 설명했다.
“잠시도 쉴 수 없어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이 말이 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바빠서 감기에 걸릴 틈도 없다는 말과, 쉼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두 발 자전거의 별명은 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그 짧은 문장에서 그의 삶의 역동성과 고뇌, 그리고 웃음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차담은 단순히 개인적인 만남을 넘어, 삶에 대한 통찰을 얻는 시간이었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순간의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고, 그의 철학과 태도는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날의 짧은 만남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았다.
마치 그가 하나의 문장처럼 다가왔다. 절제된 언어로 삶을 말하고, 짧은 농담 속에 깊은 통찰을 담아낸 그의 모습은 닮고 싶은 어른의 이상형이었다.

흐르는 된장찌개 향과 함께 기억에 남은 그의 모습은, 단순히 한 명의 멋진 인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대화는 한 편의 문학과도 같았다. 그의 삶은 쉼 없이 달려가는 두 발 자전거와 같았지만, 그 속에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민족과 삶을 향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삶의 여백을 만들어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와의 만남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을 목격한 듯한 기분이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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