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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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이상용, 불굴의 삶으로 빛난 영웅
김왕식
며칠 전, 뽀빠이 이상용 선생과 지인 몇 분이 조촐히 식사를 했다. 올해로 83세. 그럼에도 여전히 생기 넘치고 건강했다.
그야말로 노익장老益壯의 청년이었다.
또한 검소함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자랐다.
가난은 그를 꺾지 못했다. 지금도 입고 있는 가죽점퍼는 수십 년 전, 빈티지숍에서 구제옷으로 만 원을 주고 산 것이다. 세월이 묻어나는 옷처럼 그의 삶도 단순함 속에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식사 중 내내 그의 유머는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소금과도 같았다.
그의 삶의 시작은 기이할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임신 중 남편을 만나기 위해 충청남도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무려 10개월을 걸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 속에서 태어난 이상용은 미숙아였고, 병약했다. 너무 약해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외삼촌들은 그를 생매장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7살이었던 막내이모가 이상용을 구해내 산으로 도망갔다. 강력한 생명력을 지키려는 막내이모의 의지는 가족들을 움직였고, 결국 이상용을 키우기로 했다.
그의 병약함은 극단적이었다. 책가방을 들 힘조차 없어서 아버지가 대신 들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또래 아이들 수준으로 체력을 끌어올렸다. 이후 보디빌딩에 도전해 '미스터 대전고'를 수상했고, 고려대에 진학한 뒤에는 '미스터 고대'에 등극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려대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며, 그는 사람들에게 열정과 희망을 전했다.
그렇게 그는 방송계로 들어섰다. 그의 진심 어린 말과 유머는 국민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그의 프로그램은 한국 사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인기 방송인이 아니었다.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며, 진정한 천사로 불렸다. 그가 고쳐준 아이들은 다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본의 아니게 송사에 휘말리며 평생 쌓아온 명예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그를 사랑하는 국민들은 그의 무죄를 믿으며 숨죽여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무죄로 판명되었지만, 그 과정은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밝다. 그의 유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는 게 쉽지는 않아도, 포기하면 안 되지." 그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다. 그의 삶 그 자체다.
뽀빠이 이상용. 그는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아이에서, 모든 국민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가난과 병약함 속에서도 그는 일어섰고, 자신을 키워준 세상을 위해 헌신했다. 이제 그는 한낱 방송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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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전화벨이 울렸다.
"김 선생
우리
고즈넉한 교외에 가서
점심이나 할까"
참으로
따뜻한 분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