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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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의 시간들
ㅡ생과 사의 경계에서
장상철 화백
오열과 탄식.
병동 주치의실 앞은
각양각색
다양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상담실을 나온 가족의 오열.
삼십 대 중반 정도의 아낙은
흐느껴 운다.
등을 토닥이는
친정모와 남편의 위로가
그녀의 아픔을 달래기에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일 년 전부터
치료일정이 비슷해서
주기적으로
상담 대기 중에
빈번하게 뵐 수
있었던 노환자.
이번을 마지막으로
치료를 중단하고
다음 과정으로
가야 한다는
결정이 난 것 같다.
몇 개월 사이에
많이 야위고
초췌해진
모습의 노인.
반 년 전쯤
1년 생존을 선고받고
주치의 상담실을
나왔을 때가
생각난다.
병원 상담실 앞의
다양한 상황들은
많은 생각이
일어나게 하며
습하게
가슴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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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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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철 화백의 투병 기록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암 병동이라는 극단적 공간 속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겪는 절망과 슬픔을 화백은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 낸다. 그의 글에서 묘사된 "병동 주치의실 앞의 오열과 탄식"은 단순한 상황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감정의 극단을 마주하게 한다.
장 화백은 지난해 1년 생존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냉철하게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태도를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이는 단순한 의연함을 넘어, 삶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는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상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작품과 기록으로 탐구했다.
그의 작품은 미적 형식과 더불어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투병 중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예술관이 단순한 미적 탐구가 아닌, 인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진솔한 기록임을 증명한다. 병동에서의 경험은 그의 작품에서 고통과 생명의 공존, 그리고 삶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장 화백의 삶과 예술은 단순히 개인의 고난과 극복을 넘어,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와 가치를 증명하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삶과 죽음의 본질을 응시하며,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담담한 기록 속에는 치열하게 살아온 예술가의 궤적과,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은 창작의 본능이 어우러져 깊은 경외감을 자아낸다.
장상철 화백은 병동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미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의 기록과 작품은 단순한 치유와 위안을 넘어, 인간의 삶이 갖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선명히 드러낸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순간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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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백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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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한 환자입니다. 제게는 장화백님처럼 이름 있는 예술가도 아니고, 삶의 깊이를 작품으로 풀어낼 재능도 없습니다. 그저 병원에서 반복되는 치료와 통증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장화백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용기를 내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장화백님의 의연함 앞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얼마 전 암이 전이되어 의사로부터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제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도, 애써 지켜온 것들도, 꿈꾸었던 미래도 모두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듯했습니다. 병원의 차가운 진료실에서 의사의 말을 들으며, 저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화도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공허함이 가득 차서 제가 서 있는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장화백님께서 암 투병 중에도 의연하게 하루를 살아내며 작품을 이어가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선고받으셨음에도,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예술로 승화시키고 계신 모습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무너져버렸을까? 왜 나는 이 시간을 끝처럼 여기고 모든 걸 포기하려 했을까?’라고요.
장화백님께서는 병원 상담실에서 가족들의 흐느낌과 절망을 목격하시면서도,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힘을 가지셨다는 점이 저를 깊이 울렸습니다. 누군가의 울음과 고통은 항상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모습은 제게 큰 배움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병동에서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외면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울 용기도, 그들의 고통을 나눌 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화백님은 그 모든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심지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 아닐까요?
저는 한동안 병원의 침대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장화백님의 이야기를 듣고 작은 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책을 읽고, 짧은 글을 쓰고, 가족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면, 그 시간만큼이라도 제 자신을 조금씩 바꿔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불안하고, 무섭고, 때로는 절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절망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장화백님께서 제게 알려주신 삶의 태도 덕분입니다.
장화백님께서 투병 중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저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한동안 암이라는 병이 제 삶을 앗아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화백님은 오히려 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셨습니다. 암은 우리의 몸을 약화시키고, 삶을 어렵게 만들지만, 그것이 우리의 영혼까지 앗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 눈물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다짐의 눈물이었습니다.
화백님, 때로는 병이라는 현실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치료를 받을 때마다, 몸이 점점 더 약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불평과 절망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이제는 그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화백님께서 남긴 작품들과 이야기가 그 희망의 빛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도 화백님처럼 이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장화백님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그 작품 속에 담긴 삶의 흔적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장화백님의 이야기는 제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제가 살아가는 동안, 아니 제가 떠난 후에도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화백님께서 앞으로도 건강을 지켜가시며, 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또한 제게 남은 시간 동안 삶의 가치를 찾아가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자 노력하겠습니다.
화백님, 정말 감사합니다. 삶과 죽음, 고통과 희망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제게 살아가는 힘을 주신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화백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한 암 투병 환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