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의 무게

김왕식






말의 무게



김왕식


고즈넉한 둔덕 위,
눈발이 소리 없이 흩날리는 작은 집. 산길을 따라 올라온 제자의 발걸음은 피곤했지만,
그의 마음은 묵직했다.
저 멀리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창이 보이자 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긴 노정의 끝에서 마침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조용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제자는 두 손을 가볍게 맞잡고
문을 밀었다. 방 안에는 따뜻한 난로가 은은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스승은 작은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고, 그 시선은 창밖의 눈을 향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제자는 스승 앞에 조용히 앉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스승의 얼굴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제자의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는 말이란 것이 참 두렵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또 한마디가 사람을 깊이 상처 입히기도 하니까요.
저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다스려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스승은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을 하기 전엔 세 번 생각해야 한다.
신중한 말은 가치를 가지지만, 경솔한 말은 허물이 되지. 말이 많으면 허물이 많아지고, 말을 아끼면 바보라도 지혜롭게 보이는 법이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세상은 쉽게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의 뒷말을 하는 것이 너무 흔하고, 그것이 나쁜 줄도 모르고 즐기는 듯합니다."

스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남을 험담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험담하는 자는 그 말을 할 때 자신을 낮추고,
듣는 자는 참고 들을 뿐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제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가 허공을 맴돌다
조용히 땅에 내려앉았다.
문득, 자신의 말들도 그렇게 공중에서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을 줄이는 것이
최선입니까?"

스승은 난로에 나무 한 조각을 더 넣으며 말했다.

"말은 꽃이 될 수도 있고, 쓴 뿌리가 될 수도 있다.
말이 오가는 곳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퍼질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지. 말을 조급하게 내달리듯 하면 자신의 허물만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침묵이 때로는 가장 좋은 답이 된다."

제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침묵이라… 그는 여전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좋은 말을 하면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말씀입니까?"

스승은 창가로 걸어가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남을 축복하면 자신도 축복받고,
남을 저주하면 저주는 다시 돌아온다.
이는 자연의 섭리다.
누워서 침을 뱉으면 어디로 가겠느냐? 그대로 자기 얼굴을 적실뿐이다. 입을 떠난 말은 반드시 돌아오니,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제자는 스승의 말이 눈처럼 차분히 내려앉는 듯 가만히 듣고 있었다.

"경청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스승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다.
경청보다 좋은 말은 없고, 수다보다 나쁜 말도 없다.
사람들은 말하는 법만 배우려 하지만, 사실 들어주는 법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입으로 전하는 말보다 가슴으로 전하는 마음이 더 깊은 법이지."

방 안은 조용했다. 제자는 스승의 말처럼
‘듣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듯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때로는 비난과 험담을 듣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됩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난과 험담은 세 사람을 잃게 만든다.
말하는 자, 듣는 자, 그리고 비난받는 자.
어리석은 이는 남을 헐뜯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말을 듣고도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제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엔 비난이 많고,
그 비난 속에서 지혜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스승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을 세워주는 말을 하여라. 남을 비방하면
평생 빈축을 살 것이고, 반대로 칭찬하고 세워주면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관용의 등불을 밝히면 관계가 소통되고, 마음의 등불이 켜지게 된다."

제자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작은 빛이 켜지는 듯했다.

"그러면 칭찬과 아첨은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스승은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혀끝에서 나오는 말은 아첨이고, 마음에 우러나오는 말은 칭찬이다.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면, 잘못된 논리는 적개심만 남길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갈등과 미움뿐이다."

제자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거짓된 말은 한순간의 바람에도 흔들리는 불꽃같고,
진실한 말은 꺼지지 않는 빛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어떤 말을 해야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나즈막하게말했다.

"네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라.
밝고 맑고 깨끗한 마음밭에 좋은 말씨를 뿌리면,
그 말이 결국 네 삶의 열매가 될 것이다. 말은 사람이 짓지만, 그 말의 열매는 결국 자신이 거두게 되는 법이다."

제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방 안의 온기는
변함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밖에는 눈이 멈추고,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ㅡ 청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의 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