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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연가 ㅡ 시인 청강 허태기

김왕식




겨울 연가

시인 청강 허태기




눈이 내리네요
쓸쓸히 걷는 발자욱 지우며
눈이 쌓여가네요
낙엽 진 보리수 숲길
우울한 마음 안고
이방인 되어 떠나려니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네요

푸른 잎 풍성한
보리수 아래
그대와 달콤한 추억
눈보라 되어 쏟아져 내리네요

그대 떠난 빈자리
눈물이 넘쳐흘러
갈 곳 몰라하네요
발목을 스치는 눈이 한없이
무거워요

그 자리에 쓰러져
그대와의 지난날 꿈꾸면서
하얗게 잠들고 싶어요
그대 사랑 수북이 쌓여
환희의 눈물 될 때까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강 허태기 시인은 뚝심 있는 애국애족 작가로서, 그의 작품 세계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민족과 국가의 아픔을 함께 껴안는 데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민족상잔의 비극, 전쟁의 상흔, 그리고 혼란한 국가의 현실을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키며, 이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치유되기를 염원하는 철학을 지녔다.
그의 삶의 가치관은 단순한 개인의 행복을 넘어, 민족의 화해와 국가의 평화라는 큰 틀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작품 전반에 걸쳐 강하게 드러난다.

'겨울 연가'는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인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을 담은 서정시로 보인다. 허나 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별의 아픔이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혼란과 상실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내리네요 쓸쓸히 걷는 발자욱 지우며”라는 구절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덮어버리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드러낸다.
낙엽 진 보리수 숲길은 생명력의 소멸을 상징하며, 이방인처럼 떠나려는 화자의 모습은 소속감을 잃어버린 개인, 혹은 혼란한 사회 속에서 길을 잃은 민족의 자화상으로 읽을 수 있다.

푸른 잎이 풍성했던 보리수 아래에서의 달콤한 추억은 과거의 평화롭던 시절을 상징하며, 그 기억이 눈보라 되어 쏟아진다는 표현은 아름다웠던 시간이 외려 현재의 고통으로 다가옴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의 영광이 현재의 혼란과 대비되며 주는 아픔과 유사하다. “그대 떠난 빈자리”는 단순한 사람의 부재가 아닌, 잃어버린 민족의 정체성, 혹은 국가적 상실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허태기 시인의 미의식은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시의 마지막 부분, “그대 사랑 수북이 쌓여 환희의 눈물 될 때까지”라는 구절은 단순한 체념이 아닌,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허태기 시인의 철학적 지향점, 즉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염원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허태기 시인의 작품은 서정성을 넘어서서, 개인적 감정과 민족적 아픔,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연결 짓는 깊이 있는 시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아픔과 상실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환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인을 넘어, 진정한 시대의 목소리를 담은 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겨울 연가'는 이러한 그의 미의식과 철학이 농축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사유의 여운을 남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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