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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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과 함께하는 행복, 그리고 지나친 집착의 그늘
청람 김왕식
개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었다. 길고도 깊은 역사 속에서 개는 사냥을 돕고 가축을 지키며 때로는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개는 단순한 동물을 넘어 반려동물로 불리며 가족의 일원처럼 사랑받고 있다. 반려견에 대한 애정이 때로는 지나쳐 본래의 균형을 잃고 극단적인 형태로 변하는 모습도 종종 목격된다.
□ 진정한 사랑인가, 과시인가?
반려견과 함께하는 삶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루의 피곤을 잊게 만드는 해맑은 눈망울,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곁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모습,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보내는 무한한 애정은 반려견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런 사랑이 점차 과시적인 형태로 변질될 때 문제가 생긴다. 과거에는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단순한 농담에 불과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반려견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명품’의 논리가 스며들면서, 반려견을 기르는 행위가 순수한 애정보다는 과시적 소비로 변질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예를 들어 반려견의 생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모습이 그렇다. 물론 반려견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보호자의 마음이 담긴 애정 표현일 수 있다. 한껏 꾸민 호텔 연회장에서, 수십만 원짜리 강아지 전용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같은 반려인들이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건배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마치 반려견이 아니라 명망 있는 귀족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든다.
더욱이 일부 견주는 반려견에게 명품 옷을 입히고, 값비싼 액세서리를 걸어준다. 어떤 보호자는 “우리 애는 고급 브랜드가 아니면 입지 않아요.”라며 당당히 말한다. 강아지는 입는 옷의 브랜드를 인식할 리 없건만, 보호자는 이를 자랑하며 마치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듯하다.
□ 반려견의 안위를 위한 것인가, 견주의 욕망을 위한 것인가
반려견이 보호자의 곁을 잠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흥미롭다. 예전에는 이웃에게 부탁하거나 믿을 만한 지인에게 맡겼지만, 이제는 호텔이 등장했다. ‘펫 호텔’이라는 이름 아래, 일반 호텔 못지않은 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곳이 성업 중이다.
이곳에서는 반려견이 최고급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개 전용 마사지 서비스를 받으며, 심지어 VIP 케어를 받는다. 보호자는 출장이나 여행을 떠나면서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 아니, 불안하기는커녕 “우리 애는 호텔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라며 안심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러나 정작 반려견이 정말로 이러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반려견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모습도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평범한 유모차가 아니라,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유모차’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급 자동차 브랜드에서 출시한 유모차에 강아지를 태우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 이 모든 것이 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견주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개는 뛰어놀고 냄새를 맡으며 세상을 탐색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비싼 유모차 안에 갇혀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전시’되고 있는 것은 어쩐지 아이러니하다.
□ 반려견과의 이별, 그리고 초현실적 장례 문화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순간이 있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견주는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려견의 죽음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이별을 대하는 방식이 과연 온당한 수준을 유지하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최근에는 반려견의 장례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장례식장에는 조화가 놓이고, 문상객이 찾아와 애도를 표한다. 장례비용은 수백만 원에 이르고, 일부는 화장을 선택한 후 유골을 목걸이로 만들어 간직하기도 한다. 심지어 문상객이 ‘부조금’을 내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마치 인간의 장례식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극적으로 연출되는 모습은 과연 적절한 것일까? 개는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며, 인간이 하는 방식대로 애도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반려견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소비적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 반려견과의 관계,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반려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무조건적인 사랑, 충성심, 그리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순수한 시선. 하지만 인간은 반려견을 대하는 방식에서 종종 ‘소유욕’과 ‘과시욕’을 섞어버린다. 반려견을 향한 애정이 단순한 소비문화로 변질되는 순간, 그것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만족시키려는 행위로 변한다.
정말로 반려견을 사랑한다면, 비싼 옷과 유모차, 호텔과 장례식을 고려하기 전에 그들의 본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개는 바깥을 뛰어다니고, 흙냄새를 맡으며, 보호자의 곁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반려견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명품이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과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반려견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반려견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아마도, 반려견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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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 김왕식 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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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조심스레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몇 해 전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냈습니다. 사고였고,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졌고, 남은 삶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위로했지만, 그 어떤 말도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우연히 작은 강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제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가도 저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 돌아올 힘을 얻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은 제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었고, 저는 마치 제 아이에게 하듯 온 마음을 쏟아 돌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상실감을 채우려는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글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어쩌면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어느 순간 과시적 형태로 변할 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이 스며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이 아이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이유였고, 제 가슴을 데워주는 존재였습니다.
저도 반려견의 생일을 챙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건강을 위해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과시나 소비로 변질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려 합니다. 저는 이 아이가 비싼 옷을 입는 것보다, 함께 뛰어놀고 교감하는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려 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이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저의 욕심으로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반려견의 장례 문화에 대한 부분도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떠나보내야 할 날이 오면, 제가 받았던 사랑만큼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보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 슬픔을 과장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별은 슬프지만,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반려견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더 소중히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과시가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진실하게 쌓이는 것이겠지요. 저는 앞으로도 이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며, 제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하려 합니다.
글을 통해 깊은 성찰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려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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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 김왕식 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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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려견을 향한 애정이 깊어지는 사회적 흐름을 이해하면서도, 그 애정이 어느 순간 과시적 소비로 변질되는 모습에는 깊은 우려를 느낍니다. 저는 개를 키우지 않지만, 반려견을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본래의 따뜻한 의미를 잃고, 과도한 소비 문화와 결합하며 불필요한 사회적 격차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반려견을 위한 소비 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명품 옷을 입히고, 값비싼 유모차에 태우고, 호텔에서 숙박하게 하는 일들이 이제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보호자는 “우리 아이는 고급 브랜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수백만 원을 들여 반려견의 생일 파티를 엽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반려견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과시욕과 만족을 위한 것일까요?
소위 ‘소시민’이라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이러한 반려견 문화를 더욱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땀 흘리는 사람들,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를 걱정하며 아껴 쓰는 부모들, 병원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이웃들. 이들에게 반려견을 위한 호화로운 소비 문화는 낯설고도 씁쓸한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한 달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가방을, 어떤 이들은 반려견의 액세서리로 가볍게 구매합니다. 과연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반려견이 떠났을 때 치러지는 장례 문화 역시 과장된 모습이 많습니다. 개를 가족처럼 사랑했다면, 그 이별이 슬픈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수백만 원이 드는 장례 절차, 유골을 보석으로 만들어 간직하는 행위, 문상객이 부조금을 내는 문화까지 등장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가 만든 또 다른 소비 형태일 뿐입니다. 반려견은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을 애도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이미 충분한 사랑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려견을 위한 과한 소비가 점점 당연한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이는 결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반려견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지만, 그 사랑이 경제적 격차와 소비 지향적인 흐름을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반려견을 아낀다면, 화려한 장식보다 그들의 본성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글이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깊이 공감했습니다. 반려견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금 성찰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지양하는 문화가 자리 잡길 바라며, 이 편지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