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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물들이며

김왕식










서로를 물들이며




청람 김왕식





해 질 녘, 마당 평상 위에 나란히 앉은 영감이 담뱃대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여보, 나는 말여, 사는 게 참 신기한 거 같어."

할멈이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뭔 얘기여? 갑자기 철학자가 다 됐네."

영감은 저 멀리 노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냥… 산다는 게 붓질하는 거랑 같은디, 내 바탕이 있어야 당신이 그 위에 번질 수 있잖여."

할멈이 깔깔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허허, 참말로. 그럼 나는 물감이여? 당신 바탕에 촥 스며드는 그런 물감?"

영감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알록달록 번져가며 그림을 완성하는 게 인생인 거여. 혼자서는 색이 안 나와."

할멈은 부채질을 멈추고 손으로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당신 바탕이 너무 칙칙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여? 흐린 색깔로 물드는 거여?"

영감이 피식 웃으며 할멈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예쁘게 물들어야지. 당신이 내 인생에 환한 색을 칠해 줬잖여."

할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영감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둘 사이를 가볍게 스쳤다.

"그려, 서로 기대서 살아온 거지. 당신이 없었으면 나도 그냥 밋밋한 바탕이었을지도 몰라."

영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말이여, 사는 게 기대는 거랑 같은디, 당신이 기둥처럼 버티고 있으니께 내가 기대서 살아왔고."

할멈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허리에 올렸다.

"거 반댈세. 내가 당신한테 기대고 살아온 거지, 내가 없었으면 당신 벌써 넘어졌을 거 아니여?"

영감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맞아, 맞아. 서로 기대서 산 거여. 혼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기대면서 살아왔으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 아니겄어?"

할멈은 천천히 영감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려, 손 맞잡고 여기까지 왔제. 숨이 차도 같이 달려왔고, 길이 험해도 서로 부축하면서 걸어왔고."

영감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결국, 사는 거는… 사랑하면서 죽는 일이여."

할멈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어. 당신 숨이 내 숨 되고, 내 숨이 당신 숨 되고. 그렇게 한 평생을 같이 걸어왔으니께."

영감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께 말이여, 당신하고 나하고 사는 건, 꼭짓점에 도착해서 사라지는 거랑 같은 거지."

할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허허, 그 말이 참 멋지네. 근디 나는 아직 당신 손 놓을 생각 없으니께, 손 꼭 잡고 좀 더 걸어가세."

영감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노을빛이 두 사람의 손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들의 삶처럼,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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