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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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산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시
다섯메 문예담당 교사를 하면서
오산 출신 시인들 ㅡ 소월, 안서, 백석 등을
학생들과 살피던 중,
자야가 세상을 뜬 날
몇 줄 적은 시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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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자야
1
가난한 내가 사랑한 그대여
눈 내리는 밤, 길 끝에 서서
흰 당나귀 한 마리 기다리듯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눈발 속 사라진 발자국 위에
우리의 사랑이 남았을까
아니면 바람 속 흐려진 꿈으로
고요히 먼 곳에 사라졌을까
2
시린 바람 불던 경성의 골목
그대는 나를 품고 웃었네
나는 한 줌 눈을 쥐고서
그대 손 위에 놓아주었지
차가운 손끝을 맞잡으며
우리의 온기를 나누었네
사랑이란 그렇게 조용히
한 줄 시로 남겨지는 것
3
북으로 떠나던 기차 소리
그 속에 그대 울음이 있었네
나는 돌아가겠노라 맹세했지만
길은 닫히고 밤은 길었네
그대 기다림은 눈처럼 쌓이고
나는 차가운 땅에 묻혔네
사랑은 오지 않는 발걸음을
끝내 기다리는 일이었네
4
서울의 한 모퉁이 깊숙이
그대는 요정을 세우고
흩어진 추억을 모으듯이
하루하루를 채웠겠지
술잔 속 흩어지는 등불 아래
내가 남긴 시를 읊었을까
아니면 밤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나를 불러 보았을까
5
북녘의 바람은 차가웠고
그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네
혁명의 문 앞에 내 시는 닫히고
손끝의 시어는 바람이 되었네
기억 속 그대의 모습조차
이제는 희미해져만 가는데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어디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6
그대는 그리움을 품었지만
눈물은 끝내 보이지 않았네
서울의 밤을 밝히던 등불
그 속에 내 그림자 있었을까
기다림이란 끝이 없는 길
사랑이란 멀어지는 얼굴
나는 오지 않는 길 위에서
그대는 지지 않는 별빛으로
7
길상(吉祥)이란 이름을 붙이며
그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네
사랑했던 흔적을 흙에 묻고
절의 종소리에 귀 기울였네
부질없는 세월을 뒤로하고
손을 모아 바람을 품었네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을까
사랑은 소유가 아님을
8
눈 덮인 길 위에 남겨진 발자국
그것마저 지워지는 시간 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기다림이라
그대는 고요히 속삭였을까
기다림이란 결국 기도라
나는 먼 곳에서 대답했을까
우리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길상사엔 종이 울리고 있었다
9
기다림 끝에 사랑이 있고
이별 끝에 영원이 있었네
흰 당나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대의 마음은 거기 있었네
어느 겨울밤 문득 내리는 눈
그 속에 우리는 있을까
마음이 가닿는 그 자리마다
시 한 줄로 남겨지는 것
10
눈이 내리는 이 밤에도
그대의 숨결을 기억하네
흩어진 사랑을 한데 모아
이름 없는 별이 되리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한 조각 시를 새기듯이
사랑이 머문 자리마다
그대와 나는 남아 있으리
1999년 11월 14 일 자야가 세상을 뜬 날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