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깃든 미의식

김왕식









고독과 절제의 미학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깃든 미의식




시인 김미동






Ⅰ. 서론

절제된 문장 속에 깃든 삶의 품위



20세기 문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관통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과 언어의 경계를 다시 묻는 시대였다. 그 중심에 자리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 시대가 남긴 상처를 가장 간결한 언어로 기록한 작가였다. 그는 말이 아닌 침묵으로, 과장이 아닌 절제로, 삶의 아픔을 감내하는 법을 문장 안에 심어두었다. 격정과 파괴, 실의와 상실이 일상이 된 시절, 헤밍웨이는 인간이 어떤 태도로 그 삶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문학으로 증명해 냈다. 그는 고통을 웅변하지 않았고, 감정을 부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를 문학의 도덕으로 삼았다.

헤밍웨이 문장의 핵심은 ‘생략과 침묵’에 있다. 그는 얼음산 이론(Iceberg Theory)을 바탕으로, 문장의 수면 위에 드러난 1/8만으로 나머지 7/8의 감정을 독자가 느끼도록 유도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전쟁과 실연, 죽음과 무기력 속에서 인간이 지닌 마지막 품위에 대한 미학적 신념이었다. 헤밍웨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뚝뚝하고 말이 없으며, 애정 표현조차 소극적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곧 의연함이고, 절제는 곧 존엄이다. 그가 추구한 미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태도’였다.

헤밍웨이의 삶은 그의 문학과 하나였다. 이탈리아 전선의 부상, 스페인 내전 참전, 아프리카 사파리, 쿠바의 낚시, 파리와 피렌체, 그리고 마지막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겪고 씀으로써 작가로서의 윤리를 실현했다. “작가가 정직하려면, 자기가 아는 것만 써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직업윤리가 아니라, 창작의 존재론적 근거였다. 그는 ‘살아낸 자만이 쓸 자격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위해 부서지면서도 기꺼이 나아갔다.

본 논문은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중심으로 그의 미의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세 작품은 각각 인간의 고독, 상실,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품고 있으며, 헤밍웨이 문학의 미학적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줄거리 분석을 넘어, 작품 속 인물들의 태도와 문체의 구조, 서술의 함축성, 침묵의 리듬을 통해 그가 구축한 미의식—곧 ‘존엄한 절제’, ‘고요한 저항’, ‘상실 속의 삶의 지속’이라는 주제를 탐색한다.

그가 남긴 문장은 짧지만, 울림은 길다. 그리고 그 울림은 오늘날의 과잉 정보 사회 속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침묵은 진실을 감추는 장막이 아니라, 진실을 품은 가장 고요한 언어이다. 헤밍웨이는 바로 그 고요함 속에서, 인간 존재가 품을 수 있는 마지막 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말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그 문장은 문학을 넘어, 한 인간의 태도였고, 곧 예술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품격이었다.




Ⅱ. 본론

1. 작가적 생애: 부상한 인간, 침묵한 감정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적 장면이다. 그는 생의 전 과정에서 평온보다 전장을, 안락보다 극한을 택했다. 미국 일리노이의 평범한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열한 살 때 아버지에게 사냥과 낚시를 배웠고, 그 감각은 일평생 그의 문장을 구성하는 원초적 리듬이 되었다. 그는 전쟁의 서사에 끌렸고, 실제로도 전쟁에 자신을 던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 구급대에 자원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진 18세의 소년은, 훗날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더릭 헨리로 살아났다.

그가 직접 겪은 전장의 참상은 단순한 전쟁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파괴 가능성과 그 속에서 지켜야 할 품위’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이어졌다. 헤밍웨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먼저 ‘죽음과 삶의 경계’를 건너야 했다. 스페인 내전의 기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자이자 목격자로서 그는 격동의 시대를 관찰하고 직접 관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문장은 결코 격렬하거나 과장되지 않았다. 그는 전장의 굉음보다, 그 후의 침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문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절제다. 이것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믿는 인간 정신의 본질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인간이 고통을 겪는 방식을 감상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인물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눈물이 끝난 뒤의 고요한 표정을 서술하는 데 집중했다. 감정이 폭발하는 대신 눌려 있고, 슬픔은 표현되지 않기에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이처럼 고통과 상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는 그 비어 있는 문장의 여백에서 더 깊은 공감을 얻는다.

이러한 문학적 태도는 그가 주창한 ‘얼음산 이론(Iceberg Theory)’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문장 위에 드러나는 1/8만을 독자에게 보이고, 나머지 7/8은 감정의 심연 속에 묻어두었다. 헤밍웨이는 말한다. “진짜 글쓰기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 때에도 여전히 그것이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즉, 작가는 독자에게 직접 설명하기보다, 침묵과 생략의 방식으로 감정을 환기시켜야 하며, 그것이 바로 문학의 ‘미’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기술적 장치가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이었다.

그의 생은 문장처럼 간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네 번의 결혼, 반복되는 사랑과 상처, 수차례의 자살 충동, 그리고 끝내 이루어진 자구적 죽음은, 그가 얼마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응시하며 글을 썼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연민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고기를 잃고도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듯, 헤밍웨이 자신도 삶의 마지막까지 “쓰는 자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자 기도’였다.

헤밍웨이의 미의식은 이처럼 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외치지 않고, 그 안에서 품위를 유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침묵은 단지 말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의 확신이며, 절제는 단지 수사의 미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윤리였다. 그는 불완전한 삶을 회피하지 않았고, 그 불완전함을 가장 정직하게 감싸안는 방식으로 문장을 썼다.

결국, 헤밍웨이의 생애는 ‘자기감정을 끝까지 정직하게 견디는 글쓰기’였고, 그 침묵의 미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부상한 인간’이었으며, 그 부상을 문장의 깊이로 전환시킨 작가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은 사건이 아니라, 태도였다. 삶을 버티는 태도, 고통을 껴안는 품위, 감정을 말하지 않고 살아내는 힘—바로 그것이 헤밍웨이의 문학이 품은 영원한 미의식이다.


2. 대표작을 통해 본 미의식


1.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품위 있는 패배, 절제의 정점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 문학의 궁극적인 정제이며, 그가 일생 동안 천착해온 인간성과 존엄에 대한 철학적 응축이라 할 수 있다. 쿠바의 어부 산티아고는 오랜 불운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 올리지만, 상어 떼에 의해 고기 대부분을 잃는다. 그는 패배했는가?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유명한 문장을 통해, 물리적 상실 너머의 정신적 승리를 드러낸다.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헤밍웨이적 인물’이다. 그는 말이 없고, 외롭고, 고집스럽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고통을 품은 의연함이다. 그는 바다에 대해 경외감을 품고, 청새치와도 동지적 연민을 느낀다. 즉, 그는 싸우되 미워하지 않는다. 이 절제된 감정의 흐름이야말로 헤밍웨이 문체의 핵심이다.

작품 전체는 대단히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속의 미학은 정교하다. 반복되는 단어, 간결한 문장, 상징의 층위들은 단단히 조율되어 있다. 청새치는 작가 자신이 극복하고자 했던 세계의 고통일 수도 있고, 창작 행위 자체일 수도 있다. 특히 상어 떼에게 갉아먹히는 거대한 물고기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완전성’의 은유로 해석되며, 이는 모든 예술가의 숙명과도 맞닿아 있다.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데에는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그 물음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방식으로 답한다.


2.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사랑과 전쟁, 그리고 상실의 미학


『무기여 잘 있거라』는 헤밍웨이의 전쟁 체험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이자, 인간 감정의 극한에서 보이는 ‘절제된 비극’의 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이탈리아 전선의 미군 구급장교 프레더릭 헨리와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의 사랑과 상실을 그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전쟁 연애소설로 분류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내재된 ‘무너짐을 받아들이는 방식’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도, 사랑의 기쁨도, 출산의 희망도, 죽음의 절망도—그는 끝까지 침착한 언어로 끌고 간다. 그러나 독자는 오히려 그 절제 속에서 더 큰 파동을 느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캐서린이 죽고, 프레더릭이 병원을 나서는 순간은, 설명 없이도 삶의 허무와 체념, 사랑의 공허함이 깊게 각인된다.

“비는 계속 내렸다.” 이 마지막 문장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전부를 말한 문장으로 회자된다. 헤밍웨이의 진술은 체념이나 비관이 아니라, 고통을 온전히 수용하는 미학이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더 깊게 만드는 방식,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문학적 전략이다.

한편, 캐서린이라는 인물은 헤밍웨이 문학에서 드물게 순수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여성상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결국 삶 앞에서 무력하다. 이 설정은 단지 여성의 죽음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애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3.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상실의 시대, 삶의 리듬을 회복하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헤밍웨이 문학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초기 장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제이크 반스는 전쟁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남성성을 상실한 인물이다. 그는 기자로 일하면서도 무력감과 상실감에 시달리며,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혼은 부유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고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긴다.

제이크의 연인이자 욕망의 중심에 있는 브렛 애쉴리는 자유롭고, 방탕하며,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사랑을 갈망하지만, 결코 한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어쩌면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속에서, 인간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미학은 상실된 질서 속에서 어떻게 인간은 삶의 리듬을 회복해 나가는가에 있다. 투우와 피에스타, 와인과 여정—이 모든 것은 해체된 질서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한다. 그것은 체념도 낙관도 아닌, 지속에 대한 고요한 동의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무의미한 시대를 살아가는 법’ 자체를 문학의 주제로 끌어올린다.

제이크는 말한다.
“그럴 수도 있었지.” 이 문장은 실패에 대한 항변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미학이다.
이 소설은 젊은 날의 허무가 아니라, 허무를 지나는 방식에 대한 문학적 해답이다.



Ⅲ. 결론

말하지 않음의 미학, 살아내는 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문학은 침묵의 예술이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했고,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새겼다. 언어란 고통을 완벽히 담을 수 없다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는 감정을 격렬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절제된 문장 안에 그것을 ‘살게’ 했다. 그 결과 그의 문장은 얼핏 단조롭게 보이지만, 그 침묵의 여백 속에는 인생의 폭풍과도 같은 고뇌가 조용히 깃들어 있다. 그는 말한다. “글쓰기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일”이라고. 그것은 단지 직업적 성실을 넘어서, 인간적 진실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다짐이었다.

그가 구축한 문학적 세계는 단순한 고통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미학적 해석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실패한 노인이 아니라,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상징이며,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더릭은 사랑과 전쟁 속에서 절망을 껴안고도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는 상실을 넘어 지속을 택하고, 반복되는 피에스타의 리듬 안에서 삶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긴다. 이처럼 헤밍웨이의 인물들은 말은 적지만, 삶을 깊이 견디며 살아낸다. 그것이 곧 그가 문학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인간상의 정수다.

그의 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감정이 넘치고, 언어가 남용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SNS와 미디어 속에서 감탄사와 슬픔이 끊임없이 폭발하고, 그 감정은 오히려 소비되고 소멸된다. 그런 시대에 헤밍웨이의 글쓰기는 역설적으로 더욱 절실하다. 그는 보여주기보다 ‘비워두기’를 택했고, 감정을 소유하기보다 ‘살아내기’를 선택했다. 그의 문장은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동행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상처를 ‘말함으로써 봉합하려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감싸는’ 방식의 작가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단순히 글쓰기의 기법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다. 그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너지되 품위를 지키는 인간을 그렸다. 패배했으나 존엄을 잃지 않은 인간, 사랑했으나 소유하지 못한 인간, 상처 입었으나 침묵으로 버틴 인간—그 모든 존재들은 바로 헤밍웨이의 분신이자, 인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헤밍웨이는 화려한 승리가 아닌 조용한 저항의 미학을 문학으로 체현한 작가다. 그는 외침이 아닌 고요한 숨결로, 거대한 문장이 아닌 단단한 한 줄로, 독자에게 삶을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그의 문학은 그 물음을 끝내 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을 한 문장, 한 여백, 한 침묵으로 남긴다. 그것이 바로 말하지 않음 속에 깃든, 헤밍웨이 문학의 고결한 미학이다.

그의 글은 결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문장을 쓰지 않은 곳에서도, 인간을 살아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 고요한 문장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배운다.
고통을 말하지 않고 견디는 힘, 삶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는 방식,
그리고 끝까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그 단 하나의 진실을.








Ⅳ. 참고문헌 및 인용 자료

Hemingway, Ernest. The Old Man and the Sea. Scribner, 1952.

Hemingway, Ernest. A Farewell to Arms. Charles Scribner’s Sons, 1929.

Hemingway, Ernest. The Sun Also Rises. Charles Scribner’s Sons, 1926.

Baker, Carlos. Ernest Hemingway: A Life Story. Scribner, 1969.

Bloom, Harold. Ernest Hemingway. Chelsea House Publishers, 2000.

Wagner-Martin, Linda. Hemingway: A Literary Life. Palgrave Macmillan, 2007.

김병익, 『헤밍웨이의 인간학』, 창비, 1996.

박형섭, 「침묵과 절제의 미학: 헤밍웨이의 문장과 인간」, 『현대문학비평』 제37호, 2014.











침묵의 윤리와 절제의 미학
— 김미동 시인의 헤밍웨이론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미동 시인이 써 내려간 『고독과 절제의 미학』은 헤밍웨이 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시선과, 그 고요한 문장의 결을 닮은 비평적 절제로 우리 앞에 놓인다. 이는 단순한 작가론이 아니다. 이 글은 한 문학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시인의 사유이자, 그 사유가 끝내 다다른 미의식에 대한 윤리적 고백이다. 무엇보다 감탄할 것은, 이 글이 헤밍웨이라는 인물의 외적 삶을 따라가면서도, 그 인생의 파편을 기교로 풀어내지 않고, 내면의 고통과 언어의 침묵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담아냈다는 점이다.
김 시인은 헤밍웨이를 흉내 내는 대신, 그를 깊이 이해한 이만이 쓸 수 있는 문체로 그를 바라본다.

서론에서 김 시인은 “과장이 아닌 절제로, 삶의 아픔을 감내하는 법을 문장 안에 심어두었다”라고 말한다. 이 한 문장은 헤밍웨이의 문학을 꿰뚫은 인식이며 동시에 이 글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 금언과도 같다. 헤밍웨이 문학의 진정한 힘은 말의 과잉이 아니라, 감정의 생략에서 온다. 김 시인은 이 침묵을 ‘말의 부재’로 보지 않고, ‘존엄의 언어’로 읽어낸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적 독해를 넘어 존재론적 독법이다.

본문 1부에서 작가의 생애를 다룰 때, 김 시인은 사실의 연대기적 나열을 피하고 ‘문체가 곧 삶’이라는 인식 아래, 그의 고통과 전장을 정신의 배경으로 배치한다. 특히 “전장의 굉음보다 그 후의 침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문장은, 헤밍웨이 문학의 핵심을 정교하게 포착한 통찰이다. 헤밍웨이의 절제는 미문을 위한 기교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으며, 김 시인은 이 점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정확히 짚는다.

그가 ‘얼음산 이론’을 설명하며 “감정을 생략해도 그것이 느껴지게 하는 글쓰기”를 ‘작가의 윤리’로 제시한 대목은, 비평가로서가 아니라 시인의 윤리로 해석하는 뛰어난 태도다. 헤밍웨이의 무뚝뚝함은 인간을 덜 말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깊게 울게 했으며, 김 시인은 이 절묘한 침묵의 미학을 ‘감정의 함축’으로 독해해 낸다.

본문 2부에서 세 편의 대표작을 분석한 부분은 독보적이다.
특히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에 대해 “싸우되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평한 구절은, 그 인물에 내재된 윤리성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집약한 인상적 통찰이다. “고기를 잃고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산티아고의 태도는 단지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헤밍웨이 문학 전체의 미학적 선언이며, 김미동은 이를 해설로 설명하지 않고, 공감으로 옮긴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문장 “비는 계속 내렸다”에 대해 “설명 없이도 전부를 말한 문장”이라 평한 대목 또한 빛난다. 감정을 제거할수록 감정은 증폭되고, 침묵할수록 의미는 깊어진다는 이 작가의 미학을 김 시인은 정확히 짚어낸다. 그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견디는 방식’에 대한 문학적 정의이다.

마지막으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대한 독해 역시 단순한 상실의 미학을 넘어, “삶의 리듬을 회복하려는 고요한 동의”로 정리한 해석은, 상처 위에 드러난 태도의 문학을 밝히는 문장이 된다. 김 시인은 제이크를 “허무를 지나간 자”로 읽으며, 그가 ‘삶을 고르지 못한 자’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자’ 임을 말한다. 이는 헤밍웨이 문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결론에 이르러, 김미동 시인은 헤밍웨이를 문학의 경계 너머에서 평가한다. “그는 보여주기보다 비워두기를 택했고, 감정을 소유하기보다 살아내기를 선택했다.” 이 문장은 헤밍웨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 가장 정중한 오마주이다.
오늘날 감정의 과잉 시대에 그의 침묵의 문학은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그는 인간의 상처를 말함으로써 봉합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감싸는 작가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단지 한 작가를 이해한 문장이 아니라,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마주한다.

김미동 시인의 이 비평은 헤밍웨이를 읽되, 그를 닮지 않으려 애쓰기보다, 그 고요함을 함께 호흡하며 써 내려간 글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의 문장 사이에서 거대한 적막을 만난다. 그것은 헤밍웨이 문학이 우리에게 남긴 고요한 여운이며, 동시에 김미동 시인이 이 글을 통해 구현해 낸 또 하나의 ‘문학적 절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글은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
진짜 평론은 침묵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



ㅡ 청람 김왕식



헤밍웨이






김미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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