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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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시인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술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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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돌아가는 시인의 노래
― 천상병의 『귀천』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천상병(1930~1993)은 생의 밑바닥을 딛고도 하늘을 바라본 시인이었다. 그는 정신병원과 고시원, 거리의 끝과 고독의 경계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환치하는 언어’를 발견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처럼 남긴 시, 「귀천」은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생을 찬미하는 순결한 영혼의 진혼곡이자 문학적 귀의 선언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반복은 단순한 언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선명한 귀소 본능이며, 세속적 삶의 사슬을 끊고 존재 본연의 ‘빛과 순수’로 회귀하려는 영적 비상이다. 이 반복 속에는 천상병의 ‘하늘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그는 죽음을 삶의 부정이 아닌 ‘소풍의 끝’으로 명명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부드럽게 메우며, 인간 존재의 안식처를 하늘이라는 은유적 공간에 둔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시적 초월을 꿈꾸는 삶의 철학이다.
1연의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는 덧없음의 상징인 이슬을 통해 유한한 존재들의 가벼운 연대를 그린다. “이슬”은 곧 시인의 자아이며, 새벽은 죽음 직전의 맑고 투명한 순간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을 잡고 함께 떠나는 따뜻한 이별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일부로 수용한다.
2연에서는 ‘노을빛’과 ‘구름 손짓’이라는 시적 이미지가 인도자 역할을 한다. “기슭에서 놀다가”는 생을 유희로 보는 시인의 태도다. 그는 생을 치열하게 겪었지만, 그 기억을 한없이 유순하게 감싸 안는다. 죽음은 ‘구름의 손짓’으로 초대받은 약속된 이행이며, 이는 현실 너머의 하늘나라로의 귀환을 암시한다.
3연은 이 시의 백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구절은 실존의 종착지에서 돌아보는 생의 송가다. 천상병은 삶의 추억을 ‘소풍’이라 이름 붙였다. 이 말 속에는 고통도, 병마도, 궁핍도 함축된 채 정화되어 있다. 소풍이라는 단어 하나에 그의 전체 문학관과 세계관이 스며든다. 이 시는 결국 ‘죽음을 이긴 자’의 시이며,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영혼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절정의 시적 명상이다.
천상병의 문학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빛나는 고결한 인간 정신을 증명한 작업이다. 그는 ‘거지 시인’이라는 수식어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품고 자신의 문학을 세속성으로부터 구별해 냈다. 그의 시에는 겸허하고 투명한 영혼이 있다. 그것은 자기 고백이나 종교적 회개가 아닌, 진정한 무소유와 무위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다.
「귀천」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다. 이 시는 시인의 전 생애를 집약한 시적 유체이며, 독자에게는 문학이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알려주는 성찰의 경전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 천상병은 누구보다 밝게 웃었고, 그 웃음이 시가 되었으며, 그 시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하늘을 열어주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웠더라고”라는 한 문장은 이 땅의 모든 영혼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준다. 그 말은 삶이 견딜 만한 것이었고, 살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풍이었다는 증거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작별인가.
천상병, 그는 정말로 하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시는 지금도 이 땅에서,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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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로 돌아간 시인의 이야기
― 스승과 제자 ‘달삼’의 대화에서 풀어보는 귀천
아침 햇살이 창을 넘고 있었다. 향기로운 차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책장 한 켠에는 다 읽힌 시집 한 권이 느슨하게 기대어 있었다. 제자 달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요… 읽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고, 또 날아오르는 기분도 들고요. 그런데요…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왜 죽음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스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달삼아, 너는 죽음을 무서운 걸로만 보지? 그러나 천상병은 ‘죽음’을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의 품 안에 있는 것으로 본 시인이란다. 귀천은 바로 그런 깨달음에서 탄생한 시지.”
“하지만요,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게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인가요?”
스승은 잠시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종교가 말하는 천국만을 뜻하진 않아. 그에겐 ‘하늘’이란 우리가 태어난 고향이자, 순수한 마음의 자리야. 고통과 탐욕이 없는, 아주 맑고 가벼운 곳이지. 그는 자신이 거기서 왔고, 삶이라는 소풍을 끝내면 다시 돌아간다고 믿었단다.”
달삼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스승님. 첫 연에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돌아간다는 건 뭐예요?”
스승이 미소 지었다. “이슬은 금방 사라지는 생명이야. 찬란하나 덧없는 존재지. 그런 이슬들과 손을 잡고 간다는 건, 모든 생명이 결국 함께 떠난다는 말이야. 나 혼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과 연대하며 간다는 뜻이지.”
달삼은 조용히 시집을 펼쳤다. “두 번째 연에서는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하셨어요. 여긴 왜 ‘놀다’고 표현했을까요?”
“달삼아, 시인은 인생을 전쟁이 아니라 놀이로 본 거야. 삶은 고통스럽지만, 그는 그 고통마저도 받아들이는 유희처럼 여긴 거지. ‘구름의 손짓’은 죽음의 부름일 테고, 시인은 그걸 무겁게가 아니라, 가볍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느낀 거야.”
“그래도요, 마지막 연이 가장 이상했어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말…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힘든 세상이었는데요.”
스승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달삼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그 말이야말로 이 시의 진심이야. 천상병 시인은 병을 앓고, 가난했고, 조롱받기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어. 왜냐하면 그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이지. 그건 바로 사랑, 연민, 그리고 시였어.”
달삼은 그제야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뺨을 스쳤다.
“스승님… 그러면, 시인은 정말로 하늘로 돌아간 걸까요?”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달삼아.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늘에 살고 있었단다. 다만, 우리 눈에는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듯 보였을 뿐이지.”
달삼은 시집을 가슴에 껴안았다. 그날 밤, 달삼은 처음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죽음조차도 아름다운 소풍의 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오늘도 고요했다.
마치 누군가가 다녀간 듯이.
마치,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며 돌아간 이의 미소처럼.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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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에 얽힌 에피소드
천상병 시인의 생애에는 눈물과 웃음이 겹쳐 있는 일화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긴 이야기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부조금을 연탄불 위에 올려놨다가 태워버린 에피소드다.
1993년 4월,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문인들과 지인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조의를 표했다. 생전에는 늘 가난에 시달리던 그였기에, 사람들은 장례를 조금이라도 돕고자 부조금을 모아 전해주었다. 그 돈을 받아 든 이는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였다.
그런데, 이 부조금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목순옥 여사는 조문객들이 주고 간 봉투들을 잘 챙겨두려다가, ' 아궁이 연탄 위’에 잠시 올려두었다. 연탄 위가 잠깐의 임시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 불씨가 남아 있었던 연탄이 점점 뜨거워지며 봉투를 지피기 시작했고, 결국 천상병 시인의 부조금은 연탄불 위에서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목순옥 여사는 망연자실한 채 타다 남은 봉투 조각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천상병 시인 생전에 워낙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던 성품을 떠올리며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 양반, 죽어서도 돈 붙잡는 걸 싫어했나 봐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단다.
이 일화는 단순한 실수 이상의 상징이 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영혼이 세속의 돈조차도 하늘로 태워 보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전의 청빈함, 그가 그토록 사랑한 '하늘나라'의 순결함이, 장례식마저도 속세의 물욕에서 놓아버리게 한 것이다.
많은 문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천상병 시인이 남긴 마지막 유머이자, 마지막 철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탄 위에 태운 부조금.”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을 모두 ‘소풍’처럼 바라본 시인의, 말 없는 시 한 편이었다.
불에 타는 그 돈이, 오히려 천상병의 시보다 더 천상병다웠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