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백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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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시인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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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34년 신문에 산문을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사슴』이 있으며, 100부만을 자비로 출간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윤동주가 백석의 시집 『사슴』을 갖고 싶었으나 100부 한정이어서 갖지 못했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옮겨 적어서 읽었다고 전해진다. 광복 이후에는 38선 이북 지역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그대로 북한에서 살다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교육 과정에서 다뤄지거나 연구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1988년 월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지자,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백석의 작품은 감각적인 시어를 통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공동체에 대한 지향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국수>, <여우난곬족>, <모닥불>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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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에서 핀 정결한 시심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백석의 시는 늘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깊은 사유로부터 비롯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그 잃어버림의 공간을 지리적 좌표가 아닌 정신적 안식처로서 그려내는 대표작이다. 백석은 고향 정주의 순결한 풍경을 기억의 맥으로 품고 살아온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는 그 고향도, 가족도, 아내도 없는 ‘바람 세인 거리 끝’에 놓인 존재이다. 가난하고 쓸쓸한 방, 습기 어린 한 칸의 공간 속에서 그는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며 인간 존재의 깊은 바닥을 응시한다.
이 시는 단순한 유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의든 타의든 모든 것을 잃은 인간이 도달한 내면의 진실을, 백석 특유의 정결하고 민속적인 시어로 풀어낸 정신의 기도문이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의 외풍을 막아내고, 허물어진 내면의 구조를 다시 세우려 한다. 딜옹배기 화로에 손을 녹이며, 흡고한 방에 머리를 누이며 시인은 자신 안의 깊은 수치와 한숨을 곱씹는다. 그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끝없는 성찰이자 문학적 침묵의 정수이다.
무엇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연이다. 시인은 하얀 눈 내리는 저녁, 바우숲에 외로이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이 갈매나무는 단단한 뿌리를 지닌 백석 자신의 자화상이자, 세속과 고통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시인의 존재론적 이상이다. ‘갈매나무’는 고난 속에서도 정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백석의 정신을 상징하는 문학적 메타포로서, 단아하고 절제된 서정의 정점을 이룬다.
백석은 민족어의 아름다움 속에 슬픔과 고독, 그리고 정결한 인생 철학을 끌어안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남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정갈한 정서의 뿌리이며, 언어와 존재가 하나 되어 속살을 드러낸 고요한 시의 형상이다. 그는 울지 않고 운다. 말하지 않고 말한다. 그의 시는 “나는 내 슬픔에 늘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는다. 슬픔을 응시하는 그 시선 속에 오히려 생의 진실이 서려 있고, 그것은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정처 없는 시대에 문학이 도달해야 할 품격과 정결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 방은 비록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문학이 태어난 자리이자 시인이 다시 인간을 회복한 성소였다. 백석의 시는 결국, 아무리 먼 타향일지라도 내면의 갈매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다면, 그곳이 곧 고향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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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과 연꽃, 그리고 길상사의 불빛”
― 스승과 제자 달삼의 대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스승님, 오늘은 시 한 편 같이 읽고 싶어요. 마음이 좀 허전해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좋다. 오늘은 네가 먼저 고른 시를 가져와 봐라.”
달삼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백석 시인의 시예요. 이름부터 좀... 특이하죠?”
스승은 눈을 감고,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는 시지. 네가 이 시를 고른 걸 보니, 요 며칠 외로웠던 모양이구나.”
“맞아요. 뭔가… 이유 없이 허전하고, 멍하니 있고, 누군가가 그립고요.”
스승은 천천히 시의 첫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달삼은 시의 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쓸쓸해요. 시인은 마치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 같아요.”
“그렇다. 백석은 이 시에서 단순히 한 사람이 머문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야. ‘박시봉방’은 말하자면, 세상에서 잠시 밀려난 자의 마지막 은신처지.”
“그런데, ‘딜옹배기 화로에 손을 죄며’라는 부분... 너무 생생해서, 그 방에 있는 것 같아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백석의 시는 냄새가 있고, 온기가 있지. 그는 문학적으로 서정을 빚되, 삶의 골목에서 길어낸 단어만 썼거든. 그래서 이 시는 ‘추억’이 아니라, ‘현재’처럼 살아 숨 쉬는 시야.”
“그럼 이 시는 단순한 외로움의 기록이 아니군요?”
“맞다. 이건 자기 삶을 되짚는 ‘침묵의 고백’이다.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구절을 보렴. 그건 단순히 울적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가만히 되씹는 고통의 과정이지.”
“슬프네요… 그런데 시인은 왜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요?”
스승은 찻잔의 김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지켜내지 못한 사랑과 신념에 대해 부끄러웠을 거야. 그 방 안에서 그는 시를 쓰는 자이기 전에, 자신을 심판하는 존재였지.”
“그럼, ‘갈매나무’는 뭘 의미하죠? 왜 마지막에 갑자기 나무를 생각하죠?”
스승은 조용히 말했다.
“갈매나무는 흔한 나무가 아니야. 겨울에도 꺾이지 않는 굳센 뿌리의 상징이지. 백석이 그토록 기다린 무언가, 혹은 지키고 싶은 정신이었을 수도 있어.”
달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 시는 시인이 외로운 게 아니라, 외로움 자체가 된 것 같아요.”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결국 사람의 온도를 지키게 만들지. 그는 북녘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 방 안에서는 누구보다 인간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달삼이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백석 시인에겐 ‘자야’라는 여인이 있었다면서요? 두 사람, 정말 사랑했대요?”
스승은 찻주전자를 다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야, 본명은 김영한. 당대 최고의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여인이었다. 겉으론 화려했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문학을 사랑한 여인이었지.”
“어떻게 만났어요?”
“1930년대 말, 요정 ‘금홍’에서. 백석이 친구 따라 우연히 들른 자리였는데, 자야는 그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지.”
“와… 그야말로 첫눈에 반한 거네요!”
“그렇지. 백석도 그녀를 마음에 품었고, 둘은 얼마간 함께 지냈어. 하지만 시대가 그들을 오래 붙잡아두지 않았지. 백석은 이유도 없이 북으로 떠났고, 자야는 서울에 홀로 남았어.”
“그 후로는요?”
“자야는 평생 백석을 기다렸어.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면서도 ‘그가 살아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지. 손님을 맞으면서도 문득 창밖을 보곤 했대. 혹시라도 그가 돌아올까 싶어서.”
“그런데 백석은 안 돌아왔잖아요?”
“그래. 그는 북에서 다시 시를 쓰지 않았고, 살아 있는 전설처럼만 존재했지. 자야는 그런 그를 원망하지 않았어. 오히려 이렇게 말했지. ‘그가 남긴 시 한 줄로 평생을 살았으니, 나는 행복했어요.’”
달삼은 말없이 손을 모았다.
“그런 사랑… 가능한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부재까지도 끌어안는 일이란다.”
“그럼… 대원각은요? 지금은 절이잖아요. 길상사.”
스승의 눈가에 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맞다. 자야는 말년에 모든 재산을 정리해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희사했지. 수백억에 달하는 땅과 건물, 그리고 마음까지. 스님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자야의 진심에 감동해 받아들이셨어.”
“왜 그렇게 큰 결심을 했을까요?”
“자야는 말했지.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부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돌려주는 방식이었고, 또 하나의 작별 인사였어.”
“지금도 매년 백석을 위한 추모제가 열린다면서요?”
“그래. 길상사는 이제 그들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지. 자야는 연꽃처럼 조용히 사랑을 피웠고, 백석은 사슴처럼 멀리 달아났지만... 결국 둘은 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 거야.”
달삼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스승님, 저도 그런 사랑을 해볼 수 있을까요?”
“달삼아, 사랑이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야.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마음이 진짜 사랑이지. 자야처럼 말이다.”
“그럼 저는… 언젠가 길상사에 가서, 조용히 두 분께 인사드리고 올래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곳에선 사랑이 꽃처럼 피었다가 절처럼 사라졌지만, 향기는 아직도 머물고 있단다. 그 향기를 네가 꼭 느끼고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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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과 연꽃, 그리고 그리움으로 남은 사랑
― 백석과 자야, 그리고 길상사의 에피소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이었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노을 같은 말결로 시를 짓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백석.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을 “하늘이 내린 외로운 소풍객”이라 여겼다. 북녘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과 도쿄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끝내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북쪽의 별이 되었다.
그의 생애에 찬란하게 반짝였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영한, 예명 자야(紫野). 대대로 내려온 기생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인이었지만, 자야는 격조 있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영혼의 안목을 지닌 지성인이었다. 백석과 자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1930년대 말, 서울의 요정 ‘금홍’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마주쳤고, 그 자리에서 자야는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고 직감했다. 백석 역시 이 꽃 같은 여인을 마음 깊이 품었다. 그렇게 사슴과 연꽃이 서로의 심장을 물들였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수많은 시를 썼다. 자야는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봄비처럼 짧고 강렬했다. 1940년대 초, 백석은 자야에게 이별을 고한 뒤 홀연히 북으로 떠나버렸다. 이유도, 변명도, 약속도 없었다. 그저 편지 한 장 없이 사라진 그를 자야는 평생 기다렸다.
세월은 흘렀고, 자야는 백석을 가슴에 묻은 채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세상의 귀한 이들을 맞이했다. 그 대원각은 단순한 요정이 아니었다. 문인과 정치인, 예술가들의 문향이 머무는 시대의 연회장이었고, 자야가 백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랑의 전각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번도 백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살아만 있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라는 말로 그를 떠올렸다. 그녀의 사랑은 그리움으로 숙성된 포도주처럼 깊고 붉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야는 조용히 결심한다. “이제 이 사랑을, 세상으로 돌려주자.” 1995년, 그녀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대원각 전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희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을 부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법정 스님도 고사했으나, 자야의 진심 앞에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대원각은 불심의 숲,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 길상사에선 지금도 매년 백석 시인을 위한 추모제가 열린다. 자야는 그의 시 한 줄, 이름 하나로 평생을 살아낸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바위에 새긴 듯 단단했고, 연꽃처럼 흔들리되 지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는 백석의 시만큼이나 서정적이다. “그 사람을 기다리며 평생 시집도 가지 않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시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길상사의 바람결이 되어 그녀 곁에 머물렀다.
백석의 인생은 북녘의 눈처럼 조용히 사라졌지만, 자야의 사랑은 눈 속에서 피어난 동백처럼 불탔다. 둘은 끝내 만나지 못했으나,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한 세계에 다시 만났다. 세속의 연정은 식어도, 문학의 연정은 절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연정은 오늘도 길상사의 마당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마다 조용히 피어난다. 그곳엔 아직도 사슴 한 마리가 돌아올 길을 찾고 있고, 그를 기다리는 연꽃 한 송이가 절벽 끝에서 고요히 피어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