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선 작가의 '여름 무더위, 기억과 삶의 품격 ㅡ청람

김왕식









여름 무더위, 그 은근한 맛




*수필가 노영선



여름 무더위는 어느 날 불쑥 문 앞에 서 있는 손님 같다. 초인종도 없이, 그저 후끈한 기운으로 ‘나 왔다’고 알린다. 반갑진 않지만, 마당 한켠 그늘에 자리를 내어주고 얼음물 한 사발을 올려놓는다. 그러다 보면, 이 불청객이 은근히 주고 가는 선물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은 저녁 무렵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누군가 삶은 옥수수 한 소쿠리를 들고 오면, 그 냄새가 골목길을 타고 집집마다 스며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양손에 들고 뜨거운 줄도 모르고 알을 뜯어 먹던 아이들, 그 옆에서 어른들은 부채질을 하며 수다를 풀었다. “올해 옥수수가 더 잘 익었네” “비가 한 번 더 와야 참맛이 나지” 같은 말들이 옥수수 알처럼 오고갔다. 웃음소리, 부채질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한데 섞여 여름 저녁의 공기를 채웠다.


대청마루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부채를 부치며 짚신을 엮는 손놀림은 느리고 단단했다. 부채질할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고, 마루 밑에서는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졸았다. 맞은편에서는 할머니가 저고리에 하얀 동정을 달고 계셨다. 바늘이 오르내릴 때마다 얇은 천 위에 햇살이 스치고, 그 곁에 앉아 있으면 세상이 고요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시집와서 처음 맞은 여름,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어머니는 솥뚜껑에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부채를 흔들며 밥을 지으셨다. 불길을 살리느라 부채질은 거세고, 이마엔 송골송골 맺힌 땀이 빛났다. 그 땀방울에는 온 집안을 먹이는 힘이 들어 있었다. 한쪽에선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었고, 마당에선 장독대 뚜껑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불냄새, 된장향, 쪄진 곡식 냄새가 뒤섞인 부엌 안에서 나는 여름의 무게를 처음 알았다.


그 무더위는 힘겹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낮에는 온몸이 후끈 달아올라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저녁이 되면 그 땀방울이 하루를 살아낸 증거가 됐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참외를 깎아 먹는 순간, 달큰한 향과 시원한 과즙이 온몸을 식혔다. 그때의 바람은 고맙고, 그때의 웃음은 오래 남았다.


그 여름의 풍경은 내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로도 이어졌다. 이글거리는 햇볕 아래,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뛰어다니던 모습. 셔츠가 등에 달라붙고,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져도, 아이들은 “선생님, 한 번만 더 해요!” 하며 달려왔다. 숨이 가빠 말끝이 끊기면서도 친구를 향해 “너 진짜 빠르다” 하고 웃으며 건네는 그 한마디. 그 속엔 계산도, 꾸밈도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어린 날의 여름 운동장을 떠올렸다. 놀다 지쳐도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땀과 웃음이 뒤섞였던 그 시간. 그 무더위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읽고, 격려와 우정을 말로 배우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무더위가 주는 가장 맑고 귀한 선물이었다.


무더위의 첫 번째 매력은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부채질을 하며 매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하루가 조금 더 길어진다. 두 번째 매력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땀 앞에서는 멋도 체면도 무너지고, 웃음과 나눔이 남는다. 세 번째는 감각을 깨운다. 아스팔트 위 아지랑이, 참외 깎는 소리, 매미의 합창이 몸속 깊이 스며든다. 네 번째는 밤을 더 반가워하게 만든다. 낮의 더위가 깊을수록 해질녘 바람이 주는 감동은 크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모든 것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여름 무더위는 단지 견디는 계절이 아니다. 그 속에는 삶의 냄새와 소리, 땀방울 속 사랑과 그리움이 들어 있다. 땀에 젖은 옷이 불편해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름만의 은밀한 맛을 놓치지 말자. 무더위는, 우리를 조금 더 사람답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달궈진 거울이니까.



*노영선 선생은

1950년 전주에서 났다.

전주여고, 전주교대에서 공부한 후

한평생 전주 및 고양시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했고,

일산 중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샐빛문학회와 한국청람문학회에서

시ㆍ수필을 쓰고 있다.






여름 무더위, 기억의 서늘한 그늘과 뜨거운 빛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노영선 작가의 「여름 무더위, 그 은근한 맛」은 계절의 한 단면을 기록하는 듯 시작하지만, 끝내는 개인의 삶과 세대를 잇는 기억의 서사로 확장되는 작품이다. 이 글은 단순한 여름 풍경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오래 침전되어 있던 여름의 냄새, 소리, 그리고 체온을 차곡차곡 꺼내어 독자 앞에 놓는다. 무더위를 '견디는 것'에서 '맛보는 것'으로 전환시킨 제목 자체가 작가의 시선과 가치관을 압축한다. 그는 불편 속에서조차 숨은 매력을 찾고, 그 매력을 다시 삶의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태도를 지녔다.


첫 대목에서 작가는 무더위를 “불쑥 문 앞에 서 있는 손님”에 비유한다. 이는 낯설고 성가신 계절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그 불청객을 마당 한켠 그늘에 앉혀 얼음물 한 사발을 대접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무더위를 적대하지 않고, 다만 생활 속에 받아들여 그 나름의 자리를 내어주는 관용이다. 이는 작가의 삶의 철학, 곧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좋은 것을 길어 올린다’는 태도의 서두이자 전제다.


작품은 어린 시절의 마당 풍경으로 들어간다. 멍석을 깔고 옥수수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 부채질과 수다, 골목을 타고 흐르던 웃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촘촘히 배치된 감각 묘사는, 여름 저녁을 단순한 기후가 아닌 공동체의 시간으로 복원한다. 옥수수 알처럼 오고간 말들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관계의 결속을 상징한다. 이는 작가의 미의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음을 방증한다.


중반의 대청마루와 부엌 장면은 세대의 이어짐과 노동의 품격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짚신을 엮는 할아버지, 동정을 다는 할머니, 아궁이 앞에서 솥을 지키는 시어머니. 세 인물의 손동작은 각자의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과 책임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를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땀방울을 ‘온 집안을 먹이는 힘’으로 정의하며, 땀을 고귀한 노동의 결정체로 격상시킨다. 삶의 무게를 불평 대신 경외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여기에 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교사 시절의 운동장을 불러온 대목이다. 이글거리는 햇볕 아래 땀에 흠뻑 젖은 채 뛰노는 아이들, 숨이 차서 말이 끊기면서도 친구를 향해 던지는 격려의 말. 작가는 그 모습을 ‘꾸밈없는 순수한 언어’로 규정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본다. 아이들의 땀과 웃음 속에서 그는 언어의 원형, 마음이 먼저 뛰어나와 입술을 타고 흐르는 말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무더위의 매력을 ‘동심의 복원’이라는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무더위가 단지 계절적 체험이 아니라, 세대를 관통하는 감정의 통로가 되는 순간이다.


작품 후반에서 작가는 무더위의 매력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느림, 솔직함, 감각의 각성, 밤의 반가움, 기억의 영속성. 이 결론은 체험에서 길어 올린 생활철학이자, 계절을 대하는 미학적 태도의 요약이다. 그는 무더위를 불편의 상징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거기서 삶의 속도와 사람됨, 그리고 감각의 깊이를 발견한다.


문체 또한 담백하지만, 이미지와 비유가 절묘하게 스며 있다. 부채질 소리, 장독대 뚜껑의 햇빛, 솥뚜껑 김 사이의 된장향, 아이들의 젖은 머리칼과 웃음소리. 이 감각들은 서로 엮이며 한 편의 여름 정물화를 그린다. 작가의 미의식은 사물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의미를 전하는 주체로 세우는 데 있다. 그가 그려내는 여름은 기온의 높낮이가 아니라, 삶의 온도와 인간관계의 결이 중심이 된다.


「여름 무더위, 그 은근한 맛」은 계절의 기록을 넘어, 수용과 관용, 공동체와 세대, 노동과 사랑, 그리고 동심의 회복이라는 인생의 가치들을 품은 작품이다. 노영선 작가는 불편한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통찰, 그리고 사라져가는 장면을 되살리는 기록의 힘을 동시에 보여준다. 독자는 이 글을 덮으며, 땀에 젖은 옷의 불편함 속에서도 미소를 짓게 된다. 그 속에 살아 있음의 증거와,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노영선 작가가 보여준 것은 무더위의 은밀한 맛이 아니라, 그 맛을 알아차릴 줄 아는 사람의 깊이였다. 그리고 그 깊이는, 고스란히 그의 삶의 가치철학과 작품 미의식에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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