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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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시인 윤동주
사람들은 내일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내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밤이 되면
새벽이 옵니다.
근심하며 새 날을 기다리면서,
밤새 잠을 자고 일어나서 배웠습니다
내일은 더 이상...
오늘은 또 다른 날이었습니다.
친구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내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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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내일'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 시인의 '내일'은 시간과 존재, 그리고 인간이 품는 희망의 실체를 정면에서 응시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내일’이라는 단어를 의심한다.
이 의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시대와 현실 속에서 부풀려진 기대가 실제로는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몸으로 겪은 사람의 물음이다. 윤동주는 ‘내일’이 마치 도래할 구원처럼 이야기되는 사회적 관습을 파고들어, 그것이 실은 오늘의 연장이자 변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가 시 속에서 묘사하는 ‘밤’과 ‘새벽’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이는 고난과 희망, 절망과 회복의 순환 구조를 은유한다. 사람들은 새벽이 오면 어제와는 다른 무언가가 펼쳐질 것이라 믿지만, 시인의 눈에 그것은 동일한 하루의 반복일 뿐이다.
이 깨달음은 비관이 아니라, 허상을 거두어내고 실체를 직시하려는 이성의 선택이다. 윤동주는 청년 시절, 일제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 ‘내일’이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뜻하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내일이 언제나 미루어지고, 결국 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 내일처럼’이라는 결론은 체념이 아니라 허황된 위안을 경계하는 경종이다.
작품에서 ‘내일’은 종교적 구원, 정치적 독립, 개인적 희망을 모두 아우르는 상징이다. 시인은 그것을 절대적인 약속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관념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우리는 윤동주의 철학을 읽는다. 그는 거짓 위안보다, 고통스러운 진실이라도 정직하게 마주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태도는 그의 다른 시들, 특히 '쉽게 씌어진 시'나 '참회록'과도 맞닿아 있다. 거기서도 그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시대의 무게를 직시하며,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또한 '내일'의 문장 구조는 간결하고,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했다. 이는 윤동주 시의 중요한 미학이다. 그는 감정을 부풀리지 않고, 언어를 최대한 투명하게 유지한다. 독자가 그 투명한 문장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채우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절제는 그가 추구한 ‘정직한 시’의 면모이며, 나아가 그의 삶 자체를 반영한다. 그는 화려한 수사보다 맑은 시선을, 장대한 포부보다 작고 단단한 진실을 선택했다.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내일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듯 말한다. 그러나 윤동주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일은 스스로 준비되지 않으면, 오늘과 다를 것이 없다. ‘내일’이 온다는 믿음은 그저 시간의 흐름일 뿐, 본질적 변화는 우리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윤동주가 말하는 진정한 각성이다.
따라서 '내일'은 절망의 시가 아니라, 허상 속에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초대다. 내일을 기다리기보다 오늘을 새롭게 만들라는 요청, 그것이 시인이 전하는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다. 그는 밤과 새벽의 비유로 인생의 순환을 보여주면서, 그 순환을 깰 수 있는 힘이 오직 현재를 사는 주체적 태도에 있음을 암시한다.
윤동주의 ‘내일 없음’ 선언은 패배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기만에서 벗어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언어다. 그의 시선은 담담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역사의 무게와 인간 의지의 깊이가 응축되어 있다. 이 절제와 투명함, 그리고 치열한 자기 성찰이야말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이 지금까지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