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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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외상장부
강문규 작가
시골 면소재지에서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삶은 늘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삼 남매가 함께하는 일상은 부족함을 크게 느끼지 못할 만큼 단단한 울타리였다. 누님들은 도시로 유학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셨다. 시골에서 의약을 다루는 집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안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시골에서는 언제 누가 아플지 알 수 없다. 밤이든 낮이든 급히 약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돈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았다. 당장 약이 필요한 이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그분의 신조에 어긋났다. 그렇게 아버지는 외상으로 약을 내주셨고, 그 흔적은 한 권의 장부 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장부는 단순한 빚의 기록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의와 신뢰가 적힌 증표였다. 우리 집에 재산이라 불릴 만한 것이 많지 않았던 만큼, 어머니는 이 장부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일종의 금고처럼 여겼다. 언젠가 갚아질 외상값이 자식들에게는 든든한 보탬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는 노환으로 눕게 되셨다. 숨결이 가늘어지고 눈빛이 흐려지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삼 남매를 불러 마지막 당부를 하셨다. 숨을 고르며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혹시 장부를 잘 관리해 훗날 받아내라는 유언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저 외상장부를 태워다오. 그래야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순간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장부는 그동안 어머니가 금고처럼 지켜온 것이었고, 아버지의 수십 년 노고가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것은 재산을 물려주려는 유언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결국 장부에 불을 붙였다. 장부가 불길 속에서 검은 재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속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억울함과 아쉬움, 동시에 알 수 없는 해방감이 함께 밀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는 고요히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외상값이 남아 있던 동네 사람들은 우리 삼 남매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혹여 빚을 탕감받은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고개 숙이는 대신, 오히려 따뜻한 친근함과 존경의 눈빛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형편이 나아진 사람들은 사양하는데도 굳이 찾아와 외상값을 갚기 시작했다. 장부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기록된 마음의 빚은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장부를 불사르라고 하신 이유는 단순한 집착의 끈을 끊기 위함이 아니었다. 돈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아버지는 더 큰 재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장부를 태움으로써 아버지는 빚이라는 짐을 홀로 지고 가셨고, 대신 우리에게는 명예와 신뢰를 남겨주셨다. 재산이라 불릴 만한 현금이나 땅은 남기지 않으셨지만, 그보다 귀한 자산을 물려주셨던 것이다.
삶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흔히 사람들은 돈과 땅을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선택은 달랐다. 물질은 흩어지고 사라질 수 있지만, 신뢰와 명예, 그리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은 대를 이어 전해진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산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추석이 되면 우리는 성묘를 간다. 묘 앞에 서면 늘 그날의 불길이 떠오른다. 장부가 타오르며 사라지던 순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아버지의 지혜가 다시금 가슴을 울린다. 아버지는 재산이 아닌 삶의 가르침을 남기셨다. 그것은 어떤 재물보다 귀하며, 어떤 유산보다 오래 간직될 것이다.
아버지여, 비록 다시 뵐 수는 없지만, 당신의 마지막 선택은 제 삶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날 태워진 장부는 단순한 종이뭉치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불꽃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 불꽃을 가슴에 간직하고, 아버지의 지혜를 삶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올 추석에도 산소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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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규의 수필 <아버지의 외상장부>
ㅡ삶의 지혜를 불꽃으로 남기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강문규의 수필〈아버지의 외상장부〉는 단순한 가족의 회고담을 넘어, 한국 농촌 사회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적 신뢰, 그리고 한 세대가 후대에 남긴 지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 즉 외상장부를 태우라는 유언이 있다. 이는 물질적 재산의 상속이 아니라 명예와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자식들에게 남긴 고결한 행위였다.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낮춤과 나눔의 가치를 드러낸다. 아버지는 시골 약방이라는 소박한 생업 속에서 돈보다 사람을 우선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약을 구하러 오는 이들을 돌려보내지 못한 것은 단순한 인정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연민과 책임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시골 공동체가 지녔던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잊혀가는 ‘신뢰의 경제’를 되새기게 한다.
외상장부는 표면적으로는 채권의 기록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웃과 맺은 신뢰의 증서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끝내 불살라버렸다. 그 행위는 물질적 계산을 넘어서는 도덕적 결단이자, 자식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교훈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장부를 태움으로써 재산이 아니라 명예와 덕망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는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참된 삶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깊은 대답이다.
강문규의 글은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길어 올린다. 글은 시작부터 소박한 시골 약방의 풍경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며, 외상장부라는 구체적 사물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장부는 단순한 장부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상징물로 변모한다. 작품은 일상적 사물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한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적·인류적 성찰로 확장된다.
특히 작품의 절정인 ‘장부를 태워다오’라는 아버지의 말은, 극적 긴장과 상징적 울림을 동시에 지닌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재산의 포기지만, 미학적으로는 불 속에서 피어난 초월의 순간이다.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은 종이일 뿐, 그 불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인간 존엄과 사랑이다. 강문규는 이 순간을 담담한 어조로 기록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에게 더 큰 여운을 남긴다.
작품은 또한 공동체의 변화를 담아낸다. 장부가 사라진 후, 동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오히려 외상값을 갚으려는 자발적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는 인간 내면의 양심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아버지의 결단이 단순히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파급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지혜로운 선택이 공동체의 윤리를 회복시킨다’는 보편적 교훈을 제시한다.
〈아버지의 외상장부〉는 물질적 재산이 아닌 도덕적 유산의 가치를 증명한 작품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남김보다 비움이 더 큰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를 전한다. 작품의 미의식은 일상의 언어 속에 상징적 깊이를 담아, 소박하지만 고결한 삶의 철학을 드러낸다.
이 수필은 단순히 한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신뢰와 나눔,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일깨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지혜였다. 그것은 불에 타 사라진 장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며, 후대가 길이 받들어야 할 삶의 가치다.
ㅡ청람 김왕식
□ 강문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