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기 시인의 '빗소리에 묻혀'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빗소리에 묻혀




시인 청강 허태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린다

촉촉한 가을비가 더위를

적신다


어느새 꼬리 내린

폭서를 밀어내고

늦은 가을이 들어서고 있다


가로수의 은행잎이

조금씩 노랗게 물들어간다

간간이 땅에 떨어진 나뭇잎이

어슬퍼 보인다


멀리 광주의 친구가 가을 소식을 전해준다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아침산책을 하고 있다고


혹독한 무더위에 계절조차

방향감각을 상실했는지

남쪽지방에서 먼저 가을을 밟는 모양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계절도 사람도

길을 잊었나 보다

초점 잃은 시선, 멍한 생각

빗소리에 함몰된다.






허태기 시인의 '빗소리에 묻혀'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태기 시인의 시 세계는 한 개인의 사적 감수성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조국의 운명과 민족의 삶을 함께 끌어안는다. '빗소리에 묻혀'에서 반복되는 비와 혼란스러운 계절의 이미지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나라의 길을 잃은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먼저 보게 된다. 그는 시대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자연의 뒤틀린 질서 속에 은유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슬픔과 불안을 민족적 차원의 자의식으로 확장한다. 이처럼 자연을 배경 삼아 조국의 현실을 투영하는 방식은 허태기 시인의 일관된 미학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비와 바람, 낙엽과 같은 소재가 단순한 계절의 징후로 머물지 않고 언제나 나라의 현실을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은 국토의 숨결이자 민족의 정체성이며, 그 숨결이 어긋날 때 시인은 곧바로 그것을 현실의 혼란과 연결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에서 민족의 흩어짐을 듣고, 가을비의 촉촉한 리듬에서 새로운 회복의 길을 찾는 태도는 단순한 감각적 체험을 넘어선 애국적 시선이다.


허태기 시인이 보여주는 애국심은 격렬한 구호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려 담담한 서정 속에서 슬픔과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계절도 사람도 길을 잊었나 보다”라는 구절은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느끼는 독자의 마음을 절로 조국으로 향하게 한다. 이는 시인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노골적인 정치적 수사보다 은유와 상징 속에 담긴 목소리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허태기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연 속에서 길을 찾고, 민족의 고통을 개인의 감각에 실어내며, 혼란을 단순히 개탄하지 않고 성찰과 회복의 계기로 삼는다. 즉, 시를 통한 애국은 곧 성찰과 정화의 과정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 미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문학사적으로 본다면, 허태기 시인은 20세기와 21세기의 격변기를 거쳐온 한국 시인들이 보여준 전형적 태도를 잇고 있다. 서정 속에 애국을 담은 윤동주의 맑은 시선, 민족의 고통을 풍경에 겹쳐낸 박목월의 울림, 시대의 혼란을 계절과 자연에 투영한 서정주 초기 시편의 정서가 허태기의 시 안에서도 맥을 잇는다. 그는 과거의 반복이 아닌, 현대인의 언어로 이를 다시 쓴다. 일상적이고 간결한 표현 속에 시대의 비극과 애국의 마음을 담아내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빗소리에 묻혀'는 이러한 시인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는 단순히 날씨의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혼탁을 씻어내는 정화의 힘이고, 동시에 민족의 눈물과 겹쳐진다. 가을이 늦게 찾아오는 풍경은 나라가 제 갈 길을 잃은 듯한 현실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다시 찾아올 질서와 희망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시인은 이 두 겹의 의미를 겹쳐내며, 자연과 현실, 개인과 민족을 하나로 묶는다.


허태기 시인의 애국 애족의 시 세계는 바로 이처럼 은유적 서정과 현실적 슬픔의 교차 속에 존재한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면서 조국을 노래하고, 계절의 변화를 그리면서 민족의 길을 묻는다. 독자는 그의 시를 읽으며 단순히 가을비와 낙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대와 나라를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가치이며, 후대에 길이 전해질 미학적 힘이라 할 수 있다.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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