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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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 대우大愚 큰 스님
청람 김왕식
보슬비는 길을 따라 흩뿌려지고 있었다.
어제, 청민 박철언 시인과 함께 정읍으로 향하는 차창 밖 풍경은 흐린 듯하면서도 맑았다.
흰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들녘은 빗줄기에 젖어 더 짙은 초록빛을 드러냈다. 내장사 큰 스님 대우大愚 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었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만남을 맞이하는 하늘의 축복 같았다. 가는 길에 내리는 보슬비는 마침내 한 사람의 깊은 영혼 앞에 닿으려는 이들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고 있었다.
내장사에 도착했을 때, 산사는 고요 속에 젖어 있었다. 기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목탁처럼 울려 퍼지고, 솔잎은 빗물을 머금어 검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스님을 謁見하기 전부터 이미 산사는 대답 없는 법문을 설하고 있었다. 자연의 숨결 하나하나가 가르침이었다.
스님을 뵈니, 그 모습은 마치 오래 묵은 나무 한 그루 같았다. 수많은 풍상을 이겨낸 굵은 나이테가 그 얼굴의 잔잔한 미소 속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눈빛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고, 목소리는 낮게 흘러내리며 비구름 속 종소리처럼 은근히 마음을 울렸다. 산방에 앉아 차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을 들었다.
차 향이 퍼질 때마다, 세상의 번뇌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스님의 말은 짧고 담백했으나, 그 사이사이에는 세월이 삭여낸 불심이 깊이 배어 있었다. 인생의 부침浮沈과 고난이 한 잔의 차처럼 맑게 우려져 나왔다. 그 말씀은 누구를 설득하려는 언어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존재로서 전해지는 울림이었다.
그 순간 문득, “시는 시인을 닮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스님의 시는 누구를 닮았는가. 바로 스님 자신이었다. 그분의 시구는 삶에서 흘러나온 자취이며, 수행의 숨결이었다. ‘있고 없음 공이요, 없고 있음 공이다’라는 구절은 그저 언어가 아니라, 그가 평생 살아낸 삶의 자리였다. 스님이 걸어온 길과 수행의 땀이 시로 환히 드러난 것이다. 시는 삶의 그림자요, 영혼의 거울이니, 스님의 시가 스님을 닮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산방의 창밖으로 빗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빗줄기는 마당을 적시고, 나무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땅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치 수행자의 마음이 세속의 먼지를 거두고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았다. 대우 스님의 존재 앞에서, 비마저도 한 편의 시였다. 세상은 온통 시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일 뿐이었다.
차담이 끝나고 산사를 내려오는 길, 빗줄기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비에 젖은 흙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의 만남은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마음에 심긴 한 송이 법화와 같다고. 그 꽃은 오래도록 잎을 키우고, 어느 날 내 안에서 스스로 피어나리라.
정읍까지 이어졌던 보슬비는 결국 내 마음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한 수행자를 뵌 뒤 내리는 축복의 빗줄기였다. 시는 시인을 닮는다 했듯, 오늘 만난 시 또한 대우 큰스님을 꼭 닮아 있었다. 그 고요와 맑음, 그리고 자비의 빛이 내 마음의 강물에 파문처럼 번져갔다.
그날의 비는 멈추었으나, 스님께 받은 울림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맑은 빗소리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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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 하나
대우大愚 큰스님
있고 없는 것이
돌고 돌지 않는 것이
이것과 저것이
둘 아닌 하나이며
세상 어디에도
나와 내것은 없으나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은 없네
있고 없음 공이요
없고 있음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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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大愚 큰스님의 시 '어느 것 하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대우大愚 큰스님의 시 '어느 것 하나'는 불교적 공(空) 사상과 선적 직관을 담아낸 짧고도 깊은 울림의 시라 하겠다. 작품은 언어의 최소한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 나와 세계의 경계를 허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진리’를 드러낸다.
첫 구절 “있고 없는 것이 / 돌고 돌지 않는 것이”는 존재와 부재, 운동과 정지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세계를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현상 묘사가 아니라, 유(有)와 무(無)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기대어 있음을 드러내는 불교적 통찰이다. 곧, 유는 무를 떠나 있을 수 없고, 무는 유와 함께 드러나는 양면성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이것과 저것이 / 둘 아닌 하나이며”라는 구절은 불교 선종의 핵심 사유인 불이(不二)를 드러낸다. 모든 존재는 분리된 듯 보이나, 본래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로 나뉘어 인식되는 것은 언어와 분별심의 작용일 뿐,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모두가 하나임을 가르친다.
“세상 어디에도 / 나와 내것은 없으나”라는 구절은 무아(無我)의 원리를 담아낸다. 인간은 ‘나’라는 주체와 ‘내 것’이라는 집착으로 세상을 구분하지만, 실상 그러한 분별은 허상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질 뿐, ‘내 것’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다음 구절에서 “어느 것 하나 / 나 아닌 것은 없네”라 하여, 무아의 부정 위에 다시 긍정을 놓는다.
이는 곧 연기(緣起)의 사상이다. 모든 존재가 나와 관계되어 있으며, 우주 만물은 서로 의지해 있음으로써 ‘모두가 곧 나’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무아와 연기가 결합하여, 부정과 긍정이 서로를 넘어서는 궁극의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구절 “있고 없음 공이요 / 없고 있음 공이다”는 반야심경의 사유를 응축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이며, 공은 곧 존재로 드러난다는 지혜다. ‘있음’에 집착하면 속고, ‘없음’에 머물면 허무에 빠진다.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공이라는 통찰은 곧 해탈의 길이다. 대우 큰스님은 이 짧은 시를 통해 중도의 사유, 곧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공의 진리를 선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의미는 대우 스님의 삶과 긴밀히 연결된다. 스님은 1959년 출가 이후 반세기 넘게 조계종 교단의 주요 소임을 맡아 수행해 온 행적은 곧 “나와 내것은 없으나,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은 없네”라는 구절과 정확히 맞닿는다. 개인의 욕망을 비우고, 모든 중생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대승적 실천이 그의 삶에 체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와 삶을 함께 볼 때, 대우 스님의 문학적 미의식은 단순한 감각적 표현이 아니라 불교 교리와 수행의 체득에서 비롯된다. 불교적 진리를 시어로 압축하여, 누구나 짧은 언어 속에서 무한한 사유를 열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시는 불교 시문학의 모범적 성취라 하겠다.
요컨대, '어느 것 하나'는 대우 스님의 불심 깊은 수행과 사회적 헌신이 응축된 시적 화두다. 짧은 언어 속에서 무아와 연기, 불이와 공의 철학을 드러내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낸 한 수행자의 발자취와 겹쳐진다. 이 시를 읽는 이는 언어 너머의 고요를 마주하고, 삶의 근원적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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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큰 스님
당신께선
자신이 '크게 어리석은 자'라 한다
하여
大愚라 했다.
ㅡ청람 김왕식
□ 내장사 대우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