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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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것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건 세상을 천천히 읽는 일이다.
길 위에 서면,
세상은 비로소 말을 건넨다.
바람은 귀에, 나뭇잎은 발끝에,
햇살은 어깨에 닿는다.
그 부드러운 접촉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다시 느낀다.
걷기 시작하면
생각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머릿속의 소음이
발자국의 리듬에 맞춰 정리된다.
빠른 걸음으로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느린 걸음 속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걷는 일은 세상과 나의 속도를 맞추는 일이다.
서두르지 않고, 늦추지도 않고,
그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일이다.
길을 걷다 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걸림조차
삶의 한 부분임을 느낀다.
매끈하지 않은 길이
발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는 그 덕분에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걷는다는 건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주 멈춰야 한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
물결처럼 흔들리는 얇은 풀잎,
오랜 나무의 그림자.
이 모든 것은
멈추어 선 이에게만 말을 건다.
걷는 일은,
멈춤을 품은 움직임이다.
혼자 걷는 길은 외롭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맑아진다.
누구의 말도 필요 없고,
무엇을 증명할 이유도 없다.
그저 길의 호흡에 맞춰
스스로의 숨을 듣는다.
그때 문득 깨닫는다.
고요란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걸음 속에서 피어나는 리듬이라는 것을.
걷는다는 건 마음을 씻는 일이다.
지나온 일들이 흙먼지처럼 가라앉고,
현재의 공기가 폐 속 깊이 스며든다.
어제의 슬픔이 뒤로 밀리고,
내일의 불안이 아직 오지 않은 그 사이,
지금, 이 발걸음 하나가
삶의 중심이 된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걷는 자와 길,
하늘과 바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이 적어지고
감각이 넓어진다.
몸이 앞서가고, 마음이 따라온다.
둘이 따로였던 것이 하나가 된다.
그 순간,
걷기는 수행이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누군가는 산길을,
누군가는 바닷가를,
또 누군가는 도시의 좁은 골목을 걷는다.
길의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그곳은 ‘자신의 안’이다.
걷는 자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냥 걸어보라.
길이 말을 걸 것이다.
“그냥 가면 된다.”
그 단순한 진리가
길의 침묵 속에서 들려온다.
걷다 보면,
낯선 길도 익숙해지고
익숙한 길도 새롭게 보인다.
길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걷는 이가 바뀌면 세상도 달라진다.
걷는다는 건
세상을 새로 배우는 일이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걸어도
오늘의 발걸음은 다르다.
그 차이가 사람을 자라게 한다.
해질 무렵,
길 끝에서 노을이 물든 하늘을 본다.
그 빛은 늘 같은 듯 다르다.
하루의 끝,
그 빛 속에서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오늘 하루도 걸었으니 충분하다.
길은 아무 말 없지만
언제나 우리를 앞으로 이끈다.
걷는다는 건,
어제의 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일.
그리고, 내일의 나로 천천히 다가가는 일.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