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겸손의 등불을 밝히는 스승의 숨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이라는 이름 앞에서 사람들은 먼저 눈을 낮춘다.
그를 떠올리면 문득 먼 산등성이 위로 서늘하게 걸리는 한 줄기 바람이 떠오른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숨결이
지친 이마를 어루만지고, 무거운 마음을 잠시 쉬게 하는 바람.
그 바람의 주인이 바로 '허형만 시인'이다.
그는 대표작 <녹을 닦으며>처럼
한평생 자신에게 먼저 묻고, 자신을 먼저 갈고닦아온 사람이다.
한평생 대학 강단에서 수많은 젊은 영혼을 바라보던 때에도,
정년을 마치고 나서도 시인은 늘 배움의 자리에 먼저 앉았다.
스승의 자리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자리를 선택한 것이다.
주말과 평일이 구분 없는 나날들.
그는 먼 도시를 찾아가고, 다시 먼 도시로 돌아온다.
지하철의 쇳소리, 국도의 먼지, 낯선 골목의 바람결이
그의 발자국을 따라 흘러 다닌다.
시인은 조심스레 말한다.
“가르친다”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 어렵노라고.
그는 스승이기를 멈추고,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함께 생각해 보자.”
그의 강의는 늘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함께라는 말은 상대를 높이는 말이며,
생각해 보자는 말은 이미 마음을 연 사람의 말이다.
문학 강의라 하면 흔히 작품을 해부하듯 분석하고,
시어의 구조를 옮겨 적으며 정답을 말하는 이들도 많다.
허형만 시인은 누구의 작품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이의 생을 존중하고, 말 한 줄을 쓰기까지의 숨결을 먼저 헤아린다.
그는 말한다.
“시는 시인의 마음이 먼저다.
시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는 시인의 품성을 먼저 본다.
품성 없는 시는 바람 없는 등불 같아 금세 꺼지고,
품성이 깊은 시인은 비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지켜낸다.
그가 제자들에게 던진 가장 큰 가르침은
언어의 수사가 아니라 인간의 결이다.
문장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일깨운 것이다.
그의 삶에는 오래 묵은 겸손이 있다.
겸손은 억지로 낮추는 몸짓이 아니라
스스로의 그릇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이다.
허형만 시인의 겸손은 누군가의 발밑으로 내려앉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어깨에 내린 먼지를 털 듯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오래 쌓인 겸손이다.
공자의 '不恥下問'—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그 정신이 어느새 그의 숨결이 되었고,
그 숨결은 제자들에게 다시 등불이 되었다.
그는 시를 논할 때조차 ‘언어’를 보지 않는다.
언어 뒤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그가 살아낸 돌길의 흠집을 본다.
어떤 시인의 문장에 주름진 한마디가 있다면
그 뒤에 지나온 인생의 둔덕까지 함께 읽는다.
사람의 눈물을 먼저 보고,
그 눈물이 닦아낸 시어의 반짝임을 나중에 본다.
그는 늘 사람에게 귀를 먼저 열었다.
그의 시학은 어쩌면 이런 것일 것이다.
시인은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보고,
귀보다 가슴으로 먼저 듣고,
언어보다 인간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었기에 '시인 허형만'은 많은 이들의 스승이 아니라
삶을 함께 걸어준 길동무가 되었다.
그가 지나온 길을 보면
복잡한 명성과 화려한 상찬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꾸준히 걸어온 발자국만 보인다.
그 발자국 하나하나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운 자리였고,
누군가의 상처를 조용히 닦아준 자리였다.
그 자리를 지나온 바람이 지금도 제자들의 삶 속에 흐른다.
'허형만'을 말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이름이 스승의 이름으로 남는 이유는
문장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비우는 법을 먼저 배운 시인이며,
그 비움으로 타인의 빛을 살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해주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는 조용히 말한다.
“함께 생각해 보자.”
그 말 한마디는
시인들이 더 깊은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겸손의 숨이 담긴 그 문장을 따라
수많은 시인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해 왔다.
'허형만',
그는 시보다 사람이 먼저인 스승이며
사람을 사랑함으로 시를 밝히는 사람이다.
그의 겸손은 오늘도 한 줄기 바람처럼
문학의 숲을 조용히 물들이고 있다.
ㅡ청람
□ 시인 허형만 국립목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