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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바라의 향기를 지닌 사람 ― 남지심 작가를 찾아가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남지심 작가의 우담바라


□ 남지심 작가의 집필 모습







우담바라의 향기를 지닌 사람
― 남지심 작가를 찾아가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운종가 뒤켠, 세월의 결이 고요히 쌓인 한 연구소의 문을 열었을 때, 마치 오래된 숲의 숨결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장서에서 배어 나오는 나무의 향, 손길을 오래 받아 결이 깊어진 책상과 필기도구, 그리고 방 안에 내려앉은 늦가을의 적막—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면을 정직하게 닮아 있었다. 남지심 작가와 마주하자, 그 고요한 풍경이 얼굴 위의 미소와 바로 이어졌다.

작가의 표정에는 나이의 주름보다 사유의 결이 먼저 비쳤다. 여든을 넘어선 세월은 그를 깎아내리지 않고 오히려 다져냈다. 고독은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묵언의 시간들은 그의 언어 뒤쪽에 깊은 여백을 만들었다. 정제된 사람을 마주하면 말보다 침묵이 먼저 설득한다. 그와의 첫 대면이 그러했다. 마음의 속도가 저절로 늦춰지며, 내면에 있던 불필요한 소음이 사그라질 만큼 조용한 힘이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로 퍼져 나간 육백만 부의 책은 한 작가의 외적 성취가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남지심의 문학은 큰 울림을 노래하는 문학이 아니다. 오히려 낮은 숨결, 귓가에 머무는 잔향처럼 독자들의 마음에 침잠한다. 그 잔향 속에는 인간을 꾸짖지 않는 자비, 그리고 삶을 향한 깊은 관조가 자리한다.

대화를 나누던 자리에서 작가가 조용히 말한 문장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내적 마음은 한 우주입니다.”
짧은 한 문장 속에 오래 비워진 사유의 공간이 담겨 있었다. 그 우주 안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곧 탐진치의 그림자도 함께 존재한다. 그는 그것을 지우지 않고, 내쫓지 않고, 다만 부드럽게 바라보며 빛을 희석시키라고 했다. 어둠을 억지로 밀어낼 때가 아니라, 그 어둠을 감싸는 빛을 기르는 순간에 오히려 평정이 깃든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지식의 문장이 아니라 삶에서 길어 올린 문장의 울림이었다.

그의 대표작 『우담바라』는 이 철학의 문학적 형상이다.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상상의 꽃,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꽃을 통해 그는 인간 마음속 희귀한 빛을 불러낸다. 탐진치의 소용돌이를 지나 피어나는 자비의 한 송이. 그의 문학은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품고 있으나 누구나 발견하지 못하는 ‘내면의 꽃’을 그는 조용한 언어로 드러내 보여준다.

어제저녁 오랜만에 나눈 통화는 길지 않았으나 깊었다. 작가의 음성에는 설명을 넘어서는 숨결이 있었다. 단어보다 침묵이 더 크고, 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사람. 그의 목소리는 흙 속에서 꽃을 밀어 올리는 봄의 기척처럼 은근하고 단단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아 있었던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종로의 연구소를 다시 찾고자 한다. 그 공간에서 나누는 차 한 잔은 문장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순간’이 될 것이다. 어떤 책보다, 어떤 강의보다 더 많은 것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남지심 작가는 그런 존재다.

남지심 작가의 삶과 문학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겉의 높음보다 안의 깊음, 목소리의 크기보다 마음의 고요, 성취의 무게보다 평정의 빛.
세상을 흔드는 큰 환희보다, 마음속에서 사뿐히 피어나는 작은 꽃 하나가 더 오래 남는다는 진실.

그 꽃의 이름이 바로, ‘우담바라’ 일 것이다.

—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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