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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웃음 속의 가을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허, 웃음 속의 가을



내장사의 가을 산문을 걸어 오르니, 고요가 먼저 길을 내어주었다. 산 그림자는 부드럽게 기울고, 바람은 낙엽의 결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풍경은 이미 하나의 법문이었다. 숲은 깊은 침묵으로 스스로 경전을 이루고 있었고, 그 끝에서 큰스님을 알현했다.

스님의 얼굴은 오래 묵은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그 위를 감싼 빛은 맑고 따뜻했다. 여여한 내심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억지로 빚은 미소가 아니라, 세월이 스스로 길러낸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말하지 않아도 자비를 전했고,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고요히 잠재웠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님은 팔이 저리다 하시며 슬며시 당신 팔을 주무르셨다. 의아하여 이유를 묻자, 스님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치셨다. “비밀이니 누설하지 말라.” 순간 산골짜기 물소리가 번져오는 듯, 그 웃음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답은 설명이 아니라 웃음으로 건네졌다. 불심이란 무겁게 가르치지 않고도, 이렇게 유머 한 자락 속에서 빛을 드러낸다.

곧 스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어제 한나절 낙엽에 붉은 물감 물드리느라.” 그 말은 농담 같으면서도, 가을의 본질을 찌르는 법어였다. 저린 팔은 곧 붓이 되어 숲을 물들였고, 낙엽마다 번져간 붉은빛은 그 손길의 자취였다. 아픔조차 자연의 빛깔이 되는 순간, 인간의 고통도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고통은 짐이 아니라, 세상을 물들이는 붓끝이 될 수 있다.

내장사의 숲길에 바람이 다시 분다. 낙엽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빛을 환히 태운다. 큰스님의 미소 또한 그러했다. 여여한 불심은 소멸의 순간조차 가장 환한 붉음으로 바꾸어 놓는다. 수행자의 길이란 바로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이리라.

오래도록 그 웃음을 마음에 품었다. 팔의 저림은 분명 삶의 무게였으나, 그것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태도는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세상에 숨기고 싶은 비밀조차, 결국은 자연의 빛깔 속에 드러난다는 진리. 그때 깨달았다. 진정한 법은 장엄한 설법이 아니라, 웃음과 농담, 그리고 일상의 몸짓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가을의 내장사는 그렇게 내 안에 새겨졌다. 낙엽의 붉음은 불심의 빛으로 남았고, 스님의 미소는 여여한 마음의 거울이 되어 오래도록 가슴을 비췄다.

―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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