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바람의 손길
청람 김왕식
12월 중순 창밖이다.
회색빛 하늘이 낮게 누워 있었고, 바람은 느린 공진 속에서 자신만의 결을 품고 움직였다. 앙상한 나목들은 가지 끝까지 속살을 드러낸 채 고요하게 서 있었다. 흙냄새와 잿빛 공기를 품은 나무의 선들이 유달리 쓸쓸해 보였다. 바람이 가지를 스치고 나가며 냉랭한 소리를 남겼다. 그 처음의 인상은 상처였다. 바람이 나무를 긁어내고, 나목의 고독을 흔들고, 겨울의 황량함을 더 깊게 파고드는 듯했다.
시선이 길어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날카로운 것처럼 들리던 소리가 실은 다정한 숨결이었다. 거칠다고 여겼던 바람이 나무의 빈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나목을 지나가는 바람은 스침이 아니라 안부였다.
나무는 계절의 무게를 잎에 저장했다가, 가을바람 속에 그것들을 흩뿌린다. 흩어짐은 상실이 아니라 나눔이며, 비어 있음은 공백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공간이다. 잎이 모두 사라진 뒤의 나목은 초라해 보인다.
가장 단단해지는 순간 역시 그때다. 외형의 장식이 벗겨지고 나서야 본모습이 드러난다. 나무가 비워낸 자리에 다음 계절의 숨결이 스며든다. 자연은 순환의 언어로 진실을 가르친다. 인간도 같다. 삶에서 무엇인가를 잃는 순간을 실패로만 여기지만, 비워진 틈으로 빛이 스며든다. 사라진 것들의 흔적 위에 새로운 의미가 쌓인다.
바람이 나무를 감싸듯, 우리 삶에도 스며드는 손길이 있다. 누구나 홀로 서는 날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마음은 독립된 섬처럼 고요히 멀어진다. 따뜻한 말들 속에서도 공허가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자연은 고독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나목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처럼, 인간 역시 혼자 선 자리에서 자신의 선명함을 확인한다.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이 사라지고 난 뒤 비로소 삶의 중심이 또렷해진다. 버팀목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실은 뿌리가 깊숙이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다.
문득 생각이 일렁였다.
우리가 부르는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초대다. 감춰두었던 마음의 방들이 열리고, 깊은 침묵 속에서 들리는 미세한 목소리가 있다. 그 침묵은 차갑고 무겁지만, 동시에 따뜻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람은 스스로를 의지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스스로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 어디선가 닿아오는 힘이 있다. 손끝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느 온기. 자연은 그 손길을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남긴다.
바람은 난폭해 보이지만 실은 나무와 조화를 맞춘다. 거센 폭풍 속에서도 나무는 끝내 부러지려 하지 않고, 바람은 나무를 쓰러뜨리려 하지 않는다. 둘은 밀어내지 않는다. 스쳐가면서 서로의 모양을 확인하고, 각자의 리듬을 유지한다. 때로는 험하게 흔들리고, 때로는 부드럽게 감긴다. 고요와 격렬함이 서로를 위협하지 않는다. 인간 역시 밀어낼 수 없는 힘 앞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의 기척이 아니라 균형의 기척이다. 지탱되는 흔들림, 흔들려야 비로소 서는 존재가 된다.
우리 삶에도 이름 없는 손길이 있다. 누군가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말로 설명되지 않으며, 침묵 속에서만 느껴지는 절대자의 품이 있다. 그 존재를 신이라 부르든, 운명이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스며듦에 있다. 바람처럼 다가와 나목을 감싸듯, 그 존재는 조용히 마음의 가장 낮은 자리에 베인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상처라고 오해한다. 외로움이라고 여긴다. 시야를 조금만 비틀어 보면, 가장 아팠던 흔들림이 사실은 가장 깊은 보호였음을 알게 된다. 잃었다고 여겼던 날들이 축복의 전조였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 역광 속에서 드러난다.
창밖 나목은 하루 종일 침묵했다.
그 침묵이 말보다 더 큰 말을 했고, 풍경보다 더 넓은 풍경을 남겼다. 겨울의 쓸쓸함은 절망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그 거울은 우리의 외로움을 비추면서도 동시에 존재의 온기를 드러냈다. 뿌리 깊은 자리에서 숨이 일렁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로움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신호였다. 누군가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늘, 나는 바람의 결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칼날의 흔적이 아니라 팔의 무게였다.
나목을 스치는 손길이 아니라 품의 온도였다.
그 바람 속에서 나도 조용히 감싸졌다.
바람은 지나가지 않았다.
나에게 왔다.
그리고 잠시 머물렀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