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팥죽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머니의 팥죽





어릴 적 겨울밤,
부엌은 온통 붉은 숨결로 가득했다
팥이 끓는 냄비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면
나는 그 속에서 별빛을 보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팥 알갱이 서로 부딪히며
사각사각 울리던 소리,
어머니 손끝에서 물결처럼 퍼지던 온기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도
부엌 안에는 겨울을 견디는 힘이 있었다

어머니는 반죽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새알심이야,
별처럼 떠오를 거야.”
작은 둥근 점을 만들어
붉은 바다 위에 띄우던 순간,
나는 내 손끝에서
우주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첫 숟가락을 떠먹던 밤,
입 안에 퍼진 뜨거움이
온몸을 환하게 깨웠다
추운 겨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내 안이 따뜻했다
한 그릇의 팥죽에
엄마의 하루가 녹아 있었다

세월이 흐르자
어머니 손끝이 작아졌다
냄비보다 약봉지가 익숙해진 밤,
나는 비로소 알았다
팥죽이 삶을 견디는 힘이었다는 걸
사랑은 뜨거울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올해 동짓날,
팥죽 한 그릇을 놓고
빈자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엄마, 올해도 같이 먹어요.”
붉은 국물 속에서
어머니의 손길이 은은히 흔들렸다
겨울밤이 길어도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았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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