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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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의 滿席
청람 김왕식
지하철 한 칸에 분홍색이 있다.
색은 연약하고, 의도는 분명하다. 아직 오지 않은 생명을 위해, 먼저 온 배려를 비워 두겠다는 약속이다. 도시가 스스로에게 써 붙인 짧은 다짐 같은 것. 그러나 그 다짐은 늘 앉아 있다. 한 번도 서 본 적이 없다.
분홍색은 늘 바쁘다. 아주머니의 장바구니가 내려앉고, 할머니의 한숨이 포개진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붙들고, 아저씨는 휴대폰 화면에 기대어 잠든다. 분홍색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닿은 무게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 위에 임신은 없다. 대신 피로가 있다. 피로는 배보다 크고, 배려보다 빠르다.
하여,
가끔 착각이 생긴다. 이 나라에는 임산부가 참 많구나. 분홍색 좌석의 점유율을 보면 그렇다. 출퇴근 시간마다 임신 7개월쯤은 되어 보이는 ‘사정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배는 보이지 않지만, 고단함은 만삭이다. 고단함은 언제나 먼저 보호받는다.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로율은 세계 최고일 것 같다.
분홍색은 연해서 더 쉽게 흐려진다. ‘잠깐’이라는 말이 잘 스며든다. 한 정거장만, 다음 역까지만. 그렇게 잠깐은 종점까지 간다. 임산부는 아직 오지 않았고, 분홍색은 이미 일을 다 했다. 자리는 사용되었으되,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이 도시는 약속을 성실히 소비한다.
분홍색은 질문을 품는다. 정말 임산부가 없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보지 않는 걸까. 우리는 숫자를 걱정하지만, 색을 지키지는 않는다. 출산을 권하지만, 자리를 내주지는 않는다. 배려는 캠페인이 되고, 실천은 다음 사람에게 미뤄진다. 모두가 힘들다는 말 앞에서, 가장 힘들 사람은 늘 뒤로 밀린다.
언젠가 분홍색이 비어 있는 날을 보고 싶다. 아무도 앉지 않아 쓸쓸한, 그래서 제 몫을 다한 좌석을. 그날은 출산율 그래프보다 먼저 올지도 모른다. 분홍색이 제 색으로 서 있을 때, 이 도시도 비로소 사람의 무게를 올바르게 재기 시작할 것이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