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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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바로잡지 않아도 관계를 지킨다
사람은 오해를 풀어야 관계가 산다고 믿는다. 설명을 덧붙이고, 맥락을 나열하고, 진심을 증명하려 애쓴다. 이 노력은 성실해 보이지만, 모든 오해가 설명으로 풀리지는 않는다. 어떤 오해는 설명이 길어질수록 더 단단해진다.
오해가 고착되는 이유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이때 더 많은 설명은 상대의 해석 틀 안으로 들어간다. 틀 안에서는 어떤 말도 다른 의미로 번역된다.
오해를 다루는 기준은
바로잡을 수 있는 오해와 그렇지 않은 오해를 구분하는 일이다. 사실 관계의 오류는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의 해석은 바로잡기 어렵다. “그렇게 느꼈다”는 말 앞에서 설명은 힘을 잃는다. 힘을 잃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다.
관계의 목적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관계가 이해를 목표로 하는지, 공존을 목표로 하는지. 모든 관계가 완전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공존이 목표라면, 일부 오해는 미해결 상태로 두어도 된다.
행동의 일관성이다.
말로 오해를 풀지 못하더라도, 행동이 지속되면 관계는 유지된다. 약속을 지키고, 선을 넘지 않고, 기본적인 존중을 유지하는 것. 행동의 축적은 설명을 대신한다. 설명은 잊혀도, 행동은 남는다.
사람이 오해를 반드시 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오해가 남아 있으면 관계가 불안정해 보인다. 그러나 불안정함은 오해 자체보다 관계의 신뢰 수준에서 온다. 신뢰가 있으면 오해는 치명적이지 않다.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 선택은
체념이 아니다. 우선순위의 조정이다. 모든 에너지를 해명에 쓰지 않고, 관계의 유지에 쓴다. 유지에 쓰인 에너지는 소모가 아니라 투자다.
오해를 두고도 관계를 지킬 수 있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함께해야 할 이유가 남아 있을 때, 관계의 이익이 오해의 비용보다 클 때. 이 판단은 계산이 아니라 감각에 가깝다. 감각은 관계의 역사에서 나온다.
오늘 누군가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그 설명이 관계를 살릴지, 소모시킬지 한 번 더 가늠해도 된다. 설명하지 않음이 더 정직한 선택일 때도 있다.
관계와 함께 하루를 사는 법은
모든 오해를 풀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오해가 있어도 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는 일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