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는 이름 아래,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함께라는 이름 아래,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나는 지금 함께 살아간다는 미명 아래, 나의 정체성을 잃고 남의 삶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 질문은 타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점검이다. 공동체라는 이름은 따뜻하지만, 그 이름이 때로는 개인의 얼굴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함께 산다는 이유로 쉽게 타인의 기대를 자신의 기준으로 착각한다.

더불어 산다는 말은 원래 관계의 윤리를 뜻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것은 순응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불편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며, 다수의 리듬에 자신을 맞춘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언어를 잃는다. 말이 줄어들고, 표정이 단정해질수록, 안쪽에서는 이름 모를 공백이 자란다.

정체성은 주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일상의 선택으로 드러난다. 무엇에 시간을 쓰는지, 무엇 앞에서 멈추는지, 어떤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지. 이 사소한 결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결들을 타인의 일정과 평가에 맡겨둔다. 바쁘다는 이유로, 모두가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쌓인다.

종속은 강요로 시작되지 않는다. 대개는 배려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괜찮다”는 말로 자신을 설득하고, “나중에”라는 말로 미룬다. 그러나 나중에는 오지 않는다. 미뤄진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뒤편에서 계속해서 노크한다. 그 소리를 외면할수록, 삶은 점점 남의 설계도 위에서 움직인다.

공동체는 개인을 소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고유함이 만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난다. 나의 생각이 지워진 자리에 관계가 자랄 수는 없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만들어진 나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피로가 쌓이고, 무기력이 번진다. 이는 이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침묵하고 있는가. 정말로 필요한 침묵인가, 아니면 불편을 피하려는 습관인가.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가. 그것은 나를 확장시키는 선택인가, 아니면 나를 줄이는 선택인가.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방향을 묻는다.
정체성은 홀로 고립될 때 강화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다만 그 관계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나의 다름이 존중받고, 타인의 다름도 존중되는 자리. 그 자리에서만 ‘더불어’는 진짜 의미를 갖는다. 나를 버린 연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이름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데려갈 곳을 알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잡는 일은 고독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성실한 관계의 시작이다. 나를 분명히 하는 사람만이, 타인과도 분명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나를 세운 채 함께 걷는 일이다. 내 걸음의 속도를 알고, 내 발의 방향을 확인한 뒤, 옆 사람과 보폭을 맞추는 일이다. 그럴 때 공동체는 무게가 아니라 힘이 된다.

오늘, 나는 다시 나의 자리에 선다. 모두의 박수보다 한 번의 정직한 질문을 택한다. 그 질문이 나를 흔들더라도, 흔들림 속에서 나의 윤곽은 더 분명해진다. 더불어 살기 위해, 먼저 나로 사는 일. 그것이 이 질문이 나에게 요구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대답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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