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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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약속을 갱신하지 않아도 되는 날
사람은 종종
자기 자신과 약속을 맺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내일부터는 달라지겠다고, 이번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시는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고.
이 약속들은 삶을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모든 하루가
새로운 결심 위에서만 굴러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약속을 갱신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다.
아무것도 새로 결의하지 않아도 되는 날,
자신에게 다시 서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
이런 하루는 느슨함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신뢰의 결과다.
삶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굳이 스스로를 다잡지 않는다.
약속을 자주 갱신하는 삶은
열정적으로 보이지만 피로하다.
매번 출발선에 다시 서야 하고,
매번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잦아질수록 약속은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약속은 오래 남지 않는다.
자기 약속의 무게는
되풀이된 선언이 아니라
말없이 이어진 지속에서 생긴다.
이런 날에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무엇이 이미 유지되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약속은
다시 불러 세울 필요가 없다.
오늘을 시험대에 올리지 않는 태도도 필요하다.
“오늘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긴장은 집중을 가장한 불안을 낳는다.
그 대신
“오늘도 어제처럼”이라는 문장을 둔다.
이 문장은 부담을 덜어내고
행동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약속에는
예외가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약속은
현실 앞에서 쉽게 부러진다.
오늘은 평소와 다를 수 있다는 인정,
그 다름이 약속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이해.
이 유연함이 약속을
삶의 리듬 속에 남게 한다.
자기 약속을 갱신하지 않는 날에는
동기부여가 필요 없다.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고,
오늘은 그 방향 위를 걷기만 하면 된다.
동기가 줄어들어도 괜찮다.
동기는 오르내리지만,
방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약속을 자주 새로 쓰는 이유는
대개 불안 때문이다.
흐름이 멈출까 두려워
종이를 바꾸고 문장을 고친다.
그러나 흐름은 종이에서 생기지 않는다.
흐름은 오늘의 발걸음에서 생긴다.
한 걸음이라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기 약속을 갱신하지 않는 하루는
조용하다.
새로운 결심의 흥분도 없고,
실패를 과장하는 자책도 없다.
다만 하루가
제 속도로 흘러간다.
이 평온이 쌓일 때
삶은 요란하지 않게 깊어진다.
오늘,
새로운 다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의지가 사라졌다는 신호가 아니다.
이미 약속이
말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자기 자신과 함께 하루를 사는 법은
약속을 많이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약속이 굳이 호출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상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 상태에 들어서면
하루는 더 이상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아도
조용히 이어진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