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론 ― 끓을 줄 아는 지혜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냄비론
― 끓을 줄 아는 지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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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는 늘 억울한 도구다.
사람들은 무언가 가볍고 믿음직하지 않을 때 냄비를 불러낸다. 냄비 근성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금방 달아오르고 금세 식어버린다고, 깊지 못하고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냄비는 한 번도 자신을 변명한 적이 없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가장 성실하게 반응해 왔을 뿐이다.

냄비는 불이 켜지는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한다. 이 민감함을 우리는 왜 늘 결점으로만 보아왔을까. 둔중한 솥은 늦게 데워진다. 대신 오래간다. 그러나 늦게 반응하는 것이 언제나 성숙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 타버린 뒤에야 뜨거워지는 사유도 있다. 냄비의 빠른 끓음은 경박함이 아니라 직관이다. 상황을 읽고, 열을 감지하고, 즉각 몸을 내미는 태도다.

냄비는 식는다.
이것 또한 자주 비난받는다. 그러나 식을 줄 아는 능력은 아무나 갖지 못한다. 계속 끓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소진이다. 멈출 줄 모르는 뜨거움은 결국 자신을 태운다. 냄비는 알고 있다. 언제 불 위에 있어야 하고, 언제 내려와야 하는지를. 이 조절 능력은 가벼움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오래가는 것은 늘 무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온도를 다스릴 줄 아는 존재다.

냄비는 한 가지 일만 하지 않는다.
국을 끓이다가 찌개로 옮겨가고, 물을 데우다 밥을 짓는다. 상황이 바뀌면 역할도 바꾼다. 변신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늘의 세계는 이 단순한 도구보다도 유연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한 길만 고집하다 길이 사라지는 사람들, 한 정체성에 매달리다 스스로를 잃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냄비는 다르다. 쓰임을 알고, 그때그때 자신을 내어준다.

우리는 너무 오래 ‘변하지 않음’을 미덕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고착은 곧 경직이고, 경직은 결국 깨짐으로 이어진다. 생각을 한 뼘 비틀어 보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창의는 태어난다. 냄비를 다시 바라보는 일은,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읽는 연습이기도 하다.

냄비야말로 가장 솔직한 도구다.
불 앞에서 숨기지 않고, 뜨거우면 끓고, 식어야 할 때는 조용히 내려온다. 계산하지 않고, 포장하지 않는다. 직관을 믿고 민첩하게 반응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를 가장한 둔중함이 아니라, 냄비 같은 감각일지 모른다.

이제 냄비를 탓하지 말자. 대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아직도 끓을 줄 아는가.
혹은 너무 오래 식은 채로 안전한 자리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냄비는 오늘도 말없이 가르친다.
필요할 때 뜨겁게, 지나치면 내려올 줄 아는 것.

그 단순한 태도가,
삶에서는 가장 어려운 지혜임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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