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허형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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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서정의 심연을 지키는 사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고양 화정도서관은 혜안을 지닌 도서관이다.
그 혜안은 단지 ‘좋은 시인’을 초대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한 시대가 조용히 놓치고 있던 한 사람의 품격과, 한 문학의 깊이를 알아보는 눈이다.
허형만 시인의 인간의 품격, 시의 품격을 먼저 알아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정도서관은 이미 한 편의 시가 된다.
허형만 시인이 2026년 화정도서관 ‘첫 번째 고양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단순한 지역 문학행사의 한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단이 오랫동안 믿고 의지해온 ‘서정의 한 사람’을 다시 중심으로 불러 세우는 일이며, 동시에 시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조용한 선언이다. 문학은 유행이 아니라 축적이고, 시인은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허형만이라는 이름은 그 시간을 견디며 서정의 본령을 지켜온 한 존재의 증거다.
허형만 시인의 시 세계가 지닌 첫 번째 품격은 ‘언어의 절도’에 있다. 그에게 언어는 꾸미는 도구가 아니라 닿아야 할 깊이를 향해 가는 통로다. 언어의 묘미를 통해 정신의 높이에 이르려는 열망과, 그 열망이 망가뜨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절도가 동시에 존재한다. 시는 흔히 감정의 폭발로 오해되지만, 허형만의 시는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더 강한 진실에 도달한다. 그가 한 줄의 시어를 쓸 때마다 우리는 문장의 소리보다 먼저 ‘침묵의 결’을 듣게 된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허형만 시인은 우리말의 맑고 고운 속살을 섬세하게 굴착해, 언어가 가진 본래의 빛을 되살린다. 그의 시는 사회적 사건의 외곽을 돌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표정을 흉내 내지 않는다. 대신 존재의 중심을 향해 간다. 그의 시학은 구체의 소란을 잠시 내려놓고, 근원적 보편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인간이 결국 무엇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묻는다. 그 물음은 거창하지 않다. 외려 작고 따뜻한 결에서 시작한다. 그 ‘작음’ 속에 생명의 전부가 들어 있음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시인 허형만 시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기억’과 ‘그리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적 회고가 아니다. 그의 기억은 과거로 도피하지 않으며, 그의 그리움은 상실을 팔지 않는다. 기억은 그에게 삶의 원형을 찾기 위한 길이며, 그리움은 존재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힘이다. 그는 고독을 장식하지 않는다. 외려 고독을 존재의 자리로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서 세계의 근원을 다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서정은 가볍지 않고, 그의 아름다움은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그의 시가 ‘생명에의 침묵’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가르치지 않고,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간절한 음성으로 보여준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식은 요란한 수사가 아니라 심층의 고요에서 나온다. 그 고요가 깊어질수록 한 생명이 탄생하는 일이 얼마나 거대한 축복인지, 저마다의 영혼이 얼마나 고유한 빛을 갖고 있는지 독자는 깨닫게 된다. 허형만 시인의 언어는 기존의 언어가 감당하지 못한 생의 진실을 새롭게 열어젖힌다. 그는 언어를 해체하기 위해 파괴하지 않는다. 언어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한다.
허형만 시인의 존재서정은 또한 사유의 층위를 지닌다. 자연이라는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놓는 황홀경을 경험하면서도, 그 황홀경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결핍을 깊이 성찰한다. 그는 자연을 찬양하며 인간을 단죄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면서도 인간을 무마하지 않는다. 그 균형감이 그의 시를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라 ‘존재의 시’로 만든다. 세계는 아름답지만 인간은 흔들리고, 흔들리는 인간이 다시 세계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시는 비로소 탄생한다. 허형만 시인은 그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이다.
무엇보다 허형만 시인을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그는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면서도 인간의 본모습을 잃지 않은 드문 시인이다. 말이 앞서기보다 삶이 먼저인 사람, 표정이 앞서기보다 태도가 먼저인 사람, 문학을 명예로 삼기보다 책임으로 지키는 사람. 그는 언어의 폭죽을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 시어로 생의 진심을 관통한다. 그 꾸밈없는 강도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시인의 품격을 본다.
화정도서관에서 시작되는 ‘고양 작가’의 자리에서 허형만 시인을 다시 만나는 일은, 한 사람의 시인을 초대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서정의 근원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며, 삶이 너무 시끄러워진 시대에 문학이 다시 조용히 인간을 살리는 순간이다. 허형만의 시는 여전히 말한다.
아름다움은 멀리 있지 않다고.
구원은 거창하지 않다고.
한 줄의 언어가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만든다고.
허형만 시인,
그 이름은 지금도 우리 시단의 심연에서,
가장 맑고 깊은 서정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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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시인주요 약력
1973년 『월간문학』(시), 1978년 『아동문예』(동시) 등단. 국립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중국 옌타이대학 명예교수 역임. 세계 인명사전 『WHO’S WHO IN POETRY and POETS’』 등재. (사)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국제펜한국본부 인권위원장, 목포문학상 운영위원장,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장, 영랑시문학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예술상, 펜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겸 심의위원장.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녹을 닦으며> 수록. 「겨울 들판을 거닐며」 광화문 글판 베스트에 선정됨.
□ ■ 허형만 시인 평은
화정도서관 리플릿에 게재한
유성호, 박남호, 이승원, 권성호, 강정구, 김왕식 평론가의 평을 참고하여 기술했음을 밝힌다.
□ 화정 도서관 자료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