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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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남긴 상처 앞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오해가 남긴 상처다.
칼로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말 한마디에서 어긋난 마음은 오래 남는다. 더 아픈 것은, 그 오해가 대단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개는 설명이 부족했고, 듣는 쪽은 불안했고, 서로의 마음은 자기 방식대로 해석되었다. 그 작은 틈 하나가 관계를 흔들고, 사람을 지치게 한다.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 태도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외려 관계를 살리는 가장 성숙한 자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상처에는 민감하지만, 자기 말이 남긴 흔적에는 둔감해지기 쉽다. 본인은 무심히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에게는 오래 박힌 가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내 안의 ‘사정’은 나만 알고, 상대는 결과만 겪는다. 그 간극이 오해를 낳는다.
관계의 상처가 깊어지는 순간은, 억울함이 도덕이 될 때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는 말은 내 입장에서는 변명이 아니지만, 상대에게는 책임 회피로 들릴 수 있다. 마음이 다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논리보다 인정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한마디, “미안하다”는 단순한 문장, 그리고 다시는 같은 상처를 남기지 않겠다는 조용한 태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은 긴 설명이 아니라, 짧고 진한 책임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일이다.
감정이 앞서면 사람은 마음속에 쌓인 것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싶어진다. 그 순간만큼은 속이 조금 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말의 무게를 되돌려 놓는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미 던진 말은 관계를 붙잡기보다 발목을 잡는다. 오해가 풀리고 마음이 다시 가까워지려는 순간에도, 한때 표출한 문장이 다시 떠올라 상처의 뿌리를 흔든다. 결국 말은 순간의 분노를 덜어줄 수는 있어도, 관계의 미래까지 책임져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요즘은 나를 성찰한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본다. 무엇이 불편했는지, 왜 예민해졌는지, 내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상처가 올라올 때마다 그 상처를 바로 밖으로 던지지 않는다. 일단 내 안에 놓아둔다. 그 안에서 차분히 바라본다. 그러면 알게 된다. 오해의 상당수는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든 그림자였다는 것을.
나는 요즘 ‘내가 내게 들려주는 글’을 쓴다.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기 위한 글이다. 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내 태도를 정리하는 문장이다. 그 글 속에서 나는 자주 멈춘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정말 상대가 문제였나, 아니면 내 말의 온도가 차가웠던 건 아닌가.” “정말 내가 피해자였나, 혹시 나도 모르게 가해의 자리에 서 있었던 건 아닌가.”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기다려주는 것이다.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관계는 강요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음은 억지로 끌어당기면 더 멀어진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숨 쉴 자리를 주는 것이, 상대를 살리고 나를 살린다. 기다림은 체념이 아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다시 돌아올 길을 남겨두는 일이다.
성숙은 더 강하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다.
더 조용히 책임지는 능력이다. 관계에서 생긴 오해는 완벽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해를 상처로 굳히지 않는 길은 있다. 먼저 내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결국 관계를 잃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은, 상처 속에서도 배운다.
오해가 남긴 상처는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동시에 한 사람을 깊게 만드는 통로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내게 글을 들려준다.
상처를 말하기 전에, 내가 남긴 상처부터 조용히 살피라고.
그리고 조급함을 내려놓을 때, 상대는 그리움으로 스스로 돌아올 수 있다고.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