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계단 한 칸 ― 손잡이를 잡아 준 사람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마지막 계단 한 칸
― 손잡이를 잡아 준 사람



청람 김왕식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생각보다 길다.
길다는 말은 단지 계단의 개수를 말하지 않는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고,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은 자꾸만 경계 쪽으로 기운다. 사람은 아래로 내려갈 때 더 조심한다. 올라갈 때는 의지가 앞서지만, 내려갈 때는 무게가 앞서기 때문이다.


겨울은 그 무게를 더 진하게 만든다.
특히 겨울에는 계단이 사람을 시험한다.
계단 모서리에 묻은 물기 하나가 밤새 얼어붙으면 그곳은 갑자기 위험해진다. 위험은 대개 이런 작은 틈으로 온다. 누구도 일부러 다치지 않는데, 누구나 쉽게 다친다. “설마”라는 순간에 미끄러지고, “괜찮겠지”라는 마음에 넘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날도 손에 짐이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박스, 한 손에는 우산. 손이 비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먼저 불안해진다. 몸의 균형은 발바닥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손끝에서 먼저 흔들린다. 짐을 든 손은 마음의 긴장까지 함께 들어 올린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발밑을 살폈다. 하필이면 그날, 바닥은 유난히 반들거렸다.
어둠은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지만,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늘 반쯤 어둡다.
낮의 빛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곳. 사소한 그림자 하나도 크게 보이는 곳. 사람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신중해지는 곳이다. 나는 무심코 한 칸을 내디뎠다가, 발바닥이 얇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크게 미끄러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이 한 번 흐트러졌고, 그 찰나에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사람은 그 짧은 흔들림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내가 오늘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내 몸이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넘어뜨리는지. 넘어짐은 늘 큰 힘으로 오지 않는다. 작은 방심으로 온다.

그때 앞에서 내려가던 중년 신사가 뒤를 돌아봤다.
아주 짧은 움직임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사실 별것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고개는 단지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향해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그는 내 손을 보았다. 내 짐을 보았다. 내 걸음을 보았다. 그 시선은 낯설지 않았다.

평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눈빛도 아니었다.
잠깐 멈추어 주는 눈빛이었다.
그는 말없이 계단 손잡이 쪽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손잡이를 손으로 쓱 닦아 주었다. 손잡이에 묻은 물기 때문이었다. 정말 사소한 물기였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만큼 작았고, 누군가는 ‘뭐 어때’ 하고 잡고 내려갈 만큼 하찮았다.

그러나 그는 알았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하찮은 물기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미끄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작은 습기가 손끝을 미끄럽게 하고, 손끝의 미끄러움이 발의 균형을 흔들고, 그 균형의 흔들림이 인생을 잠깐 꺾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그 연결을 알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누군가를 부축해 본 사람처럼, 혹은 한 번쯤 넘어져 본 사람처럼.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깐 멈췄다.

배배에는
화려한 말이 앞서지 않는다. 표정도 크지 않다. “제가 도와드릴까요?”라는 선언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넘어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먼저 움직이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나치게 선명하지 않다. 그래서 더 귀하다. 귀한 것들은 늘 조용하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내려갔다.
닦인 손잡이는 깨끗했다기보다 ‘안전했다’. 물기가 지워져 손끝이 덜 불안했고, 발걸음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도 함께 단단해졌다. 사람은 손끝이 안정되면 마음도 안정된다. 손은 몸의 가장 바깥에 있지만, 마음과 가장 빠르게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 계단 한 칸을 밟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손잡이가 따뜻해서가 아니었다.
손잡이를 닦아 준 마음이 따뜻했다.
그 남자는 이미 앞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도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아마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다정함은 대개 이렇게 스쳐 간다. 남기고 가지 않는다. 사진도 없고, 연락처도 없고, 뒷이야기도 없다. 다만 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래서 오래간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늘 내가 붙잡은 것은 손잡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배려였다는 것을.


인생은 늘 계단 같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잘 나갈 때보다 힘이 빠질 때 더 넘어지기 쉽다. 그리고 넘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고, 급하면 다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내려가고 올라간다. 어떤 날은 가벼운 발로, 어떤 날은 무거운 마음으로. 어떤 날은 웃으며, 어떤 날은 겨우 버티며.
그 길에서 누군가가 손잡이를 닦아 주는 순간이 있다면,
그 하루는 충분히 견딜 만해진다.
세상이 모두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도, 누군가가 말없이 한 칸을 정리해 주는 날이 있다면 사람은 다시 중심을 잡는다. 그리고 그 중심은 큰 성공에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배려, 아주 짧은 기다림, 아주 조용한 손길에서 온다.


그날의 마지막 계단 한 칸은 지금도 기억난다.
내 발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한 칸을 밟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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