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먹어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금 먹어






어느 날, 빵집에 들어섰다.
눈이 오던 날도 아니고, 크게 춥지도 않은 날이었다. 다만 마음이 어쩐지 꺼칠했다. 별일이 없는데도 별일이 있는 것처럼 지치는 날이 있다. 사람은 그런 날,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비어 보여서 무언가를 사 먹는다.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소보로 하나면 될지, 단팥빵이면 좋을지, 크림이 들어간 건 또 괜히 무겁지 않을지. 고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다독이는 중이다.

그때 내 옆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고개가 진열대 높이에 겨우 닿는 아이였다. 아이는 유리 너머 빵들을 보고 있었는데, 보는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계산대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 쥔 동전이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아이는 동전을 손바닥 위에 펼쳐 놓고 몇 번이고 세었다. 그리고는 다시 빵들을 바라봤다. 마치 자기 마음과 돈의 무게를 맞추는 사람처럼. 그 모습이 어른 같아서 더 귀여웠다.
아이는 조심조심 가장 작은 빵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져갔다.
직원은 가격을 말했고, 아이는 동전을 내밀었다.
그런데 동전이 조금 모자랐다. 정말 딱 그만큼. 큰 차이가 아니라, 아이의 얼굴을 붉게 만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아이는 잠깐 멈췄다. 눈이 흔들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어른들도 그렇다. 울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힘들다.

그때 뒤에서 줄 서 있던 할아버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 아이 건, 내가 같이 계산하지.”
목소리는 작았고, 표정은 더 작았다.
직원은 자연스럽게 계산을 마무리했다. 마치 원래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아이는 얼른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제가… 다음에…”
말이 끝나지 못했다.
다음에가 언제인지,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이도 잘 모르는 다음에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다음에 말고,

지금 먹어.”


그 말이 참 좋았다.
돈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이의 얼굴을 살려 주는 말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빵을 고른 사람’으로 돌려놓는 말이었다.

아이는 빵을 꼭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정말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고맙다’보다 먼저 나온 웃음이었다. 살아났다는 웃음이었다. 마치 잠깐 숨이 막혔다가 공기가 들어온 사람처럼, 아이는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할아버지는 줄 끝으로 다시 물러섰다.
자랑도 없고, 뿌듯함도 없고, 설명도 없었다.
그냥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람처럼,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 무심한 다정함이 더 품격 있었다. 사람을 돕는 방법에도 품격이 있다는 걸, 그 짧은 순간에 배웠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미소가 났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세상이 특별히 좋아진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내 하루까지 바꿔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배려는 내게 한 것이 아닌데도, 나는 덩달아 힘이 났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다. 남의 온기가 내게도 옮겨 붙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내는 힘은 대단한 결심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이런 데서 나온다. 빵 하나의 가격, 동전 몇 개의 차이,

“지금 먹어”라는 말 한 줄. 세상이 각박해도, 사람의 심장이 아직 말랑거릴 수 있다는 증거가 남아 있는 날.

그날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따뜻했다.
어쩌면 사람은 빵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온기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온기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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