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잠깐만요



청람 김왕식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섰다.
몸은 집에 도착했는데, 마음은 아직 길 위에 남아 있었다. 하루는 길었고, 말은 많았고, 끝맺지 못한 말들이 몇 개 남아 목구멍 안쪽에 걸려 있었다. 웃으며 넘겼지만 속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그런 날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 손끝마저 무겁다. 문은 늘 열리는데, 마음은 자꾸만 닫힌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현관 앞 바닥은 낮에 내린 비 때문인지 얇게 젖어 있었다. 조명은 환했지만 따뜻하진 않았다. LED 불빛은 밝을수록 차갑다. 나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삐’ 하는 소리가 좁은 공간에 붙었다. 문이 열리면서 안쪽에서 밀려 나온 공기가 있었다. 오래된 공기, 사람들이 드나드는 냄새, 건물의 숨 같은 것.

문을 지나 들어섰다.
문은 곧 닫히려 했다. 자동문은 늘 성급하다. 누군가를 기다릴 줄 모른다. 바로 그때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급했다. 급함은 소리의 크기보다 호흡의 흔들림으로 느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내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의 손이 문을 붙잡고 있었다.

앞에 있던 사람이었다.
내가 들어올 때 먼저 들어간 주민 한 사람이 뒤를 돌아 문에 손바닥을 댄 채 서 있었다. 손바닥이 문을 막고 있었다. 흔히 보는 장면인데, 그날은 그 손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서두르지 않는 손이었다. 마치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손.

그런데 문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택배 기사님이었다.
두 팔 가득 박스를 안고 있었다. 종이박스 모서리가 기사님의 팔을 살짝 눌렀다. 손목은 한 번 더 힘을 주고 있었다. 그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는 둔탁했다. 숨은 짧았다. 땀 냄새가 아니라 ‘부지런함’의 냄새가 났다. 누구나 아는 풍경인데, 이상하게 그날은 더 선명했다.

기사님은 문턱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박스가 흔들리지 않게. 발끝이 걸리지 않게.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문을 잡고 있던 주민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말은 없었다. 웃지도 않았다. 다만 문이 닫히지 않게 손바닥의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발끝으로 문 아래를 살짝 받쳤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사람은 아마 여러 번 이렇게 문을 잡아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친절이 이벤트가 아니라 습관이었다.

기사님이 문을 통과했다.
박스들이 하나둘 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졌다.
주민은 그제야 손을 뗐다. 문이 닫히며 ‘철컥’ 하고 잠겼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부드럽게 들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별일도 아닌데 마음이 풀렸다.
문 하나 잡아 준 것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따뜻해졌다. 사람은 겨울에만 춥지 않다. 관계 속에서, 시선 속에서, 바쁨 속에서 더 춥다. 그런데 문 하나가 그 추위를 잠깐 막아 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은 조금 덜 빠르게 돌아갔다.

택배 기사님은 복도에서 박스를 바닥에 잠시 내려놓았다.
팔을 한번 털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오늘은 문 잡아 주는 분이 많네요.”
정말 작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문 잡아 주는 사람.’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예뻤다. 친절이 아니라, 직업처럼 들렸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름 없는 직업.
문은 원래 열렸다 닫히는 물건인데,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누군가가 한 번 더 눌러 주면 닫히지 않는다. 누군가가 한 번 더 기다려 주면,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문을 잡아 준 그 주민을 슬쩍 바라봤다.

그는 이미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었다. 특별한 옷도, 특별한 걸음도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늘 그런 얼굴로 살아간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누군가의 하루를 살려 놓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 위 작은 불빛이 켜졌다.
문이 열리며 ‘띵’ 소리가 났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는 무심코 ‘열림’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뒤에서 누가 오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한 번 더 눌렀다. 이유는 없었다. 다만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문을 잡아 주는 사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날 밤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방은 늘 그 방이었는데, 이상하게 조금 밝았다.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라,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문 하나 잡아 준 장면이 내 안에서 오래 남아, 오늘 하루의 거칠음을 조금 둥글게 만들었다.
사람은 큰 감동으로만 살아나지 않는다.
외려 가장 작은 배려에서 더 깊이 살아난다.

누군가의 손이 문을 잡아 주는 동안, 내 마음도 잠깐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은 닫혔다.
그러나 그날의 따뜻함은 닫히지 않았다.


ㅡ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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