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장갑의 손 ― 잃어버린 지갑이 돌아오는 방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검은 장갑의 손
― 잃어버린 지갑이 돌아오는 방식










비가 얇게 내렸다.
눈이 아니어서 더 불편한 비였다. 우산을 펴도 어깨가 젖고, 바닥은 미끄럽고, 사람들은 서로를 더 빨리 지나친다. 저녁과 밤 사이, 역 앞 공기는 젖은 철 냄새가 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코트를 여몄다.

그날 나는 두 번이나 지갑을 꺼냈다.
한 번은 편의점에서 물을 사며, 한 번은 역사 안의 작은 약국에서 밴드를 사며. 피곤한 날에는 ‘내가 뭘 했는지’보다 ‘내가 뭘 흘렸는지’가 먼저 온다. 지갑은 늘 손에 있다가, 어느 순간 손에서 사라진다. 잃어버린 건 돈이 아니라, 순간이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사람들이 흐르는 방향이 있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편한데, 마음은 끝내 멈칫한다. 나는 코트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을 확인하는 습관이 갑자기 떠올랐다.
없었다.

주머니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몸이 먼저 차가워졌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나는 가방 지퍼를 열었다. 지퍼 소리가 ‘주르륵’ 길게 났다. 가방 안쪽, 옆칸, 작은 주머니. 아무리 손을 넣어도 지갑의 모서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 찰나에 사람은 희한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화부터 낸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었을까.
왜 하필 오늘일까.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이 손끝을 때리듯 와닿았다.
[카드 승인 알림] 4,800원 / ○○편의점 / 19:42
내가 방금 들렀던 곳이 아니었다.
시간도 미묘하게 어긋났다.
나는 플랫폼 한쪽으로 비켜섰다. 사람들의 어깨가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역의 안내방송이 멀리서 울렸다. 그 소리가 갑자기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다시 오르는 발걸음이 급했다. 계단 손잡이를 한 번 붙잡았다. 손끝이 조금 젖었다. 비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역무실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 직원이 나를 보았다. 내 표정이 이미 말보다 빨랐을 것이다. 나는 짧게 말했다.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카드가… 방금 승인됐습니다.”
직원은 나를 안쪽 의자 쪽으로 안내했다.
그는 “괜찮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았다. 대신 “확인해 보겠다”는 얼굴을 했다. 사람은 위로보다 해결을 먼저 원하는 순간이 있다.
직원은 질문을 짧게 던졌다.
“언제 마지막으로 지갑을 확인하셨나요?”
“아까… 7시쯤요. 편의점에서 물 사고… 약국에서도….”
“어느 동선으로 오셨어요?”
“역 앞에서 들어와서… 개찰구 지나고… 플랫폼 내려가다가….”
직원은 컴퓨터로 분실 접수 화면을 열었다.
키보드 소리가 일정했다. ‘탁, 탁, 탁.’ 그 소리가 나를 조금 진정시켰다. 혼란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조용함이다. 조용함은 최악의 상상을 키운다. 그런데 이곳은 조용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직원은 무전기를 들었다.
그리고 역 안을 순찰 중인 직원에게 말했다.
“지갑 분실 신고 들어왔습니다. 검정 반지갑. 카드 승인 알림 발생. 동선은 약국, 편의점, 개찰구 쪽. CCTV 확인 요청합니다.”
무전기에서 ‘치직’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그 작은 소리가 내게는 구조신호 같았다.
그 순간 핸드폰이 또 울렸다.
[카드 승인 알림] 12,000원 / ○○마트 / 19:49
이번에는 더 큰 금액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람이 지갑을 주웠다는 건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연달아 결제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건 분명히 ‘사용’이었다.
직원이 내 표정을 보고 말했다.
“일단 카드 정지부터 하시죠. 지금요.”
나는 그 자리에서 카드사 앱을 열었다.
손끝이 떨려 화면이 잘 눌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두 번 틀렸다. 그 짧은 실패가 더 사람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결국 정지 버튼을 눌렀다.

[카드 사용 중지 완료]

잠깐의 정적이 왔다.
나는 그 정적 속에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돈이 나가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내 이름이 낯선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이름은 한 번 더럽혀지면 오래 남는다.
직원은 CCTV 화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역 안의 시야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이 작은 점처럼 움직였다.
그 작은 점들이 오늘의 내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다.
직원이 화면을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칸을 가리켰다.
“여기… 보이시죠.”
약국 앞이었다.
나는 약국을 나와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 뒤로 젊은 남자가 있었다.
검은 장갑을 끼고,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장갑은 이상한 장갑이 아니었다. 그냥 겨울 장갑이었다. 요즘 장갑은 다 검다. 그게 문제였다. 너무 흔해서 더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바닥에 뭘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었다.
정확히는, 내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순간.
나는 모른 채 걸어갔고, 지갑은 바닥에서 한 번 튀었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 젊은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지갑을 주웠다.
여기까지는 흔한 장면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는 바로 내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지갑을 손에 쥐고 잠깐 서 있었다.
마치 망설이는 사람처럼.
직원이 말했다.
“이분이 바로 신고자님 지갑을 주운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목이 바짝 말랐다.
‘주운 사람’이라는 단어가
그 순간에는 ‘도둑’과 ‘은인’ 사이 어딘가였다.
그때 무전기가 다시 울렸다.
치직. 그리고 다른 직원의 목소리.
“역무실, 현재 지갑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1층 편의점 쪽에서 확인됩니다.
지갑을 들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나도 따라나섰다.


복도는 밝았고, 그 밝음 속에서 내 심장만 어두웠다.
1층 편의점 앞.
그 남자가 있었다.
검은 장갑, 검은 패딩.
한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도망갈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굳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직원이 먼저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지갑 주우셨죠?”
남자는 움찔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엔 주인을 찾아야겠다 싶었는데…
안에 카드가 있길래… 신분 확인을 하려고….”
그가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장갑 위에서 조금 떨렸다.
그 떨림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는 대개 눈이 빨라지고 말이 많아진다.
그는 눈도 말도 느렸다.
직원이 묻는다.
“그래서 결제를 하셨어요?”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네… 편의점에서.
그냥… 4,800원… 그걸로 주인 이름이 뜨나 확인하려고….”
그 말은 사실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공포 속에서 더 이상한 선택을 한다.
‘확인’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방법을 고른다.
그리고 그 잘못이 더 큰 잘못이 되기 전에 멈추는 사람이 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남자에게 말했다.
“그 지갑… 제 겁니다.”
남자는 내 얼굴을 보자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갑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는 지갑 안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내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 작은 사진은 늘 내게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낯설게 빛났다.
사진이 한 사람을 멈춰 세운 것이다.
남자가 낮게 말했다.
“그 사진 보고…
진짜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역무실에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분노’가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안도의 힘이었다.
내가 지갑을 되찾았다는 안도보다,
세상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는 안도였다.
직원이 절차대로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남자는 묵묵히 응했다.
도망치지 않았다. 변명도 길게 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으로 남은 ‘양심’이었다.
나는 지갑을 받았다.
손끝이 따뜻해졌다.
지갑이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 하루가 다시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오늘 정신이 없어서….”
나는 아주 짧게 말했다.
“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길게 하면 서로의 얼굴이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며 우산을 펼쳤다.
비가 그의 어깨 위로 얇게 내려앉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역무실로 돌아왔다.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돌아오셨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비는
조금 덜 차갑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하루를 훔쳐 가지 않고,
끝내, 되돌려 놓았기에.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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