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가랑비가 만든 바다
가랑비는 늘 작다.
하늘이 마음을 다 쓰지 않은 듯,
한두 방울의 망설임처럼 내려와
어깨에 앉았다가, 이내 사라진다.
하여, 사람은 그 비를 우습게 본다.
젖는 것은 옷깃뿐이라 여기고,
세상은 여전히 멀쩡하다고 착각한다.
적우침주(積雨沈舟).
쌓인 비가 배를 가라앉힌다.
이 말은 비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를 말한다.
한 방울의 비가 아니라,
한 방울이 한 방울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 끈질긴 머묾이
결국 물의 얼굴을 바꾸고,
무게의 결론을 만든다.
배는 처음부터 침몰하지 않는다.
처음엔 물 한 모금이 들어온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틈으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조그만 균열로
삶의 바닥에 조용히 스민다.
그 물은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저 “괜찮다”는 말 뒤편에서
조심스레 높이를 키운다.
그리고 어느 날,
배는 큰 파도에 진 것이 아니라
작은 빗방울의 꾸준함에 졌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는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눈부신 성공은 번개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랑비의 오랜 작전이다.
오늘의 한 문장,
내일의 한 페이지,
매일의 한 걸음,
웃지 못해도 지켜내는 한 약속.
그 사소한 것들이
낮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삶을 채워 올린다.
혹자는 말한다.
“그 정도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라고.
그러나 가랑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스며드는 방식으로 증명할 뿐이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조용히 반복하며,
사람이 믿지 못하는 기적을
습관의 이름으로 이루어낸다.
가랑비는 꽃잎을 부풀리고
가랑비는 돌의 표정을 바꾸며
가랑비는 길을 씻어
마침내 새로운 길을 만든다.
뜻을 이룬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이라는 한 장의 종이에
꾸준히 같은 글씨를 적어
인생이 결국 그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이다.
비는 쌓이면 강이 되고,
강은 모이면 바다가 되듯
작은 결심은 쌓이면 운명이 된다.
적우침주는 또한 경고이기도 하다.
좋은 비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나쁜 비도 쌓인다.
작은 미루기, 작은 핑계,
작은 무성의, 작은 무례.
그것들이 습관이 되면
어느새 인생의 배는
보이지 않는 물을 먹고
모르면서 가라앉는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 안에 쌓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뜨게 하는 비인가,
나를 가라앉히는 비인가.
그럼에도 결론은 단순하다.
당장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꾸준한 것은 반드시 도착한다.
가랑비가 끝내 바다를 만들 듯,
작은 성실은 끝내 사람을 만든다.
큰 뜻은 큰 소리로 태어나지 않는다.
작은 날들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오늘도 한 방울.
내일도 한 방울.
그 한 방울이 모여
어느 날,
당신의 배를 침몰시키는 비가 아니라
당신의 배를 띄우는 바다가 되기를.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