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70여 년
삶을 돌아보며
이제사
느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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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다
시련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삶은 이미 멈춘 삶에 가깝다. 고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장은 뛰고 있으나, 떨림이 없다면 그것은 생의 온도가 아니다. 고통은 불청객처럼 찾아오지만, 실은 생의 증거다. 우리는 아픔을 통하여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잠시 숨을 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곧 또 다른 굽이가 나타난다. 마치 산등성이를 넘고 정상에 올라섰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눈앞에는 내려가는 길이 펼쳐지고, 다시 오를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정상은 도착점이 아니라 통과점이다. 인생은 그 통과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고통은 제거의 대상이기 이전에 해석의 대상이다. 같은 비를 맞아도 어떤 이는 저주를 말하고, 어떤 이는 대지를 적시는 축복이라 말한다.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삶의 표정은 달라진다. 시련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지 않는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힘을 끌어내기 위해 온다.
산을 오르는 이는 안다. 오르막이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오래 머물 수도 없다. 바람이 거세고, 머물기에는 산소가 옅다. 결국 내려와야 한다. 내려옴은 실패가 아니다. 다시 오르기 위한 숨 고르기다. 인생도 그러하다. 성취는 잠시이고, 배움은 길다. 기쁨은 짧고, 성찰은 깊다.
고통을 지혜롭게 극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왔는가를 묻기보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질문을 바꾸면 고통의 결이 달라진다. 시련은 칼날처럼 차갑지만, 그 칼날에 마음을 벼리면 단단해진다. 무딘 쇠는 불 속을 지나야 비로소 제 모양을 갖춘다.
설령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고통이 수반된다. 그것이 억울할 이유는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이고, 변화는 늘 저항을 동반한다. 우리는 저항을 통과하며 넓어진다. 좁은 자아가 조금씩 깨지고, 더 큰 시야를 얻는다. 고통은 확장의 통로다.
생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오르고 또 내려올 것이다. 누구도 영원한 정상에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오름과 내림 속에서 사람은 깊어진다. 처음에는 산을 이기려 했으나, 나중에는 산과 더불어 걷는 법을 배운다. 고통을 없애려 하기보다, 고통과 함께 걷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완전한 평온을 약속하지 않지만, 끊임없는 성장을 허락한다. 시련은 생의 그림자이되, 동시에 생의 빛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빛의 방향을 배운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