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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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온기, 그 자리의 변화
명절은 한때 마을 전체가 한 몸이 되는 축제였다. 해가 뜨기 전부터 골목은 분주했다. 새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은 세배를 다니며 어른들의 손을 잡았다. 세뱃돈을 쥔 작은 손에는 세상의 기쁨이 다 들어 있는 듯했다. 골목 끝에서는 딱지치기가 벌어졌고, 논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날이면 팽이가 돌아가며 쇳소리를 냈다. 썰매는 얼음 위를 미끄러졌고, 연은 겨울 하늘을 찢듯이 올라갔다. 하늘은 높았고, 아이들의 웃음은 더 높았다.
부엌에서는 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전을 부치는 소리와 함께 집집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아낙들은 화롯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얼굴에는 웃음이 얹혀 있었다.
노인들은 탁주 잔을 기울이며 세월을 나누었다. 이야기에는 논두렁의 풍년이 있었고, 자식들의 안부가 있었으며, 흘러간 세월에 대한 담담한 자부가 있었다. 명절은 사람을 이어 붙이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명절 풍경은 사뭇 다르다. 아이들은 방문을 닫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화면 속의 전쟁과 점수는 현실보다 더 긴박하다. 골목은 조용하고, 딱지 대신 게임 패드가 손에 쥐어진다. 얼음판은 사라졌고, 연을 날리던 하늘은 아파트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웃음소리는 이어폰 안으로만 흐른다.
어른들의 대화도 달라졌다. 화롯가 대신 거실 소파가 자리를 차지한다. 탁주 대신 커피잔이 놓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부동산 시세가 있고, 주식 그래프가 있으며, 정치의 옳고 그름이 자리한다. 말은 점점 높아지고, 서로의 의견은 부딪힌다. 끝은 종종 다툼으로 흐른다. 명절이 쉼이 아니라 긴장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변화는 시대의 흐름이라 말할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삶의 조건이 달라진 만큼, 명절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는 되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과거의 명절이 모두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이 있었고, 불편함이 있었으며, 여성들의 고단함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서툰 말에도 귀를 기울이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의 명절에도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 있다. 화면을 잠시 끄고,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일. 부동산과 정치의 논쟁 대신, 한 해를 버텨낸 수고를 먼저 말해 주는 일. 아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노인의 옛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 명절의 본질은 음식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다. 사람이다.
명절은 달력 위의 빨간 날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어야 한다. 골목이 북적이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그 온기만은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연이 하늘을 오르듯,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띄울 수 있다. 탁주 한 잔의 따뜻함처럼, 짧은 공감이 긴 다툼을 덮을 수 있다.
명절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축제가 되기도 하고, 피로가 되기도 한다. 올해의 명절만큼은 조금 느리게, 조금 낮은 목소리로, 조금 더 따뜻하게 서로를 맞이해 보는 일. 그 작은 변화가 사라진 골목의 웃음을 다시 불러올지 모른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