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묻어 둔 마당의 기억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달빛 아래 묻어 둔 마당의 기억





대보름이 오면,

이상하게도 어릴 적 마당 냄새가 먼저 떠오른다. 겨울 끝자락의 차가운 공기와, 그 속에 스며 있던 나무 타는 냄새. 동네는 설날보다 조금 느슨했고, 그렇다고 평소 같지도 않았다. 집집마다 작은 기대가 있었다. 둥근달이 뜨는 밤, 무언가 한 번 더 비는 날이었다.

아침이면 어머니는 오곡밥을 안치셨다. 콩과 팥과 조와 수수가 한솥에 들어가 푹 익어가던 그 시간, 부엌은 유난히 따뜻했다. 김이 오르는 솥뚜껑을 열면 고소한 냄새가 방 안까지 번졌다.

“올해는 아프지 말아야지.”

어머니는 밥을 푸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말이 꼭 주문처럼 들렸다.

아이들은 부럼을 깨물 날만 기다렸다. 호두와 땅콩을 한 움큼씩 쥐고 마당으로 나가, 이를 악물고 ‘딱’ 소리를 냈다. 깨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 소리만으로도 액운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이가 시큰해도 웃음이 먼저 나왔다. 서로 누가 더 크게 부럼을 깼는지 자랑하며, 겨울 햇살 아래를 뛰어다녔다.

해가 지고 나면 진짜 대보름이 시작되었다. 동네 어귀 공터에 쌓아 둔 나뭇더미가 달집이 되었다. 어른들은 말없이 장작을 더 얹었고, 아이들은 그 주변을 맴돌았다. 불이 붙는 순간, 마른나무가 타들어가며 큰 소리를 냈다.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우리는 저 불길이 액운을 다 태워버리길 믿었다.
달은 그 위에 떠 있었다. 크고 둥글게. 불빛과 달빛이 함께 마을을 밝히던 그 밤은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어둠이 있어도 환했다. 어른들은 한 해 농사가 잘되길 빌었고, 아이들은 그저 그 분위기가 신나서 소리쳤다. 누군가는 소원을 조용히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빛은 길을 따라 길게 흘렀다. 눈이 남아 있던 해에는 그 빛이 더 환했다. 발자국이 또렷이 찍혔다.
마치 하늘이 우리를 기억해 주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머니는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내어주셨다. 불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고, 얼굴은 달빛에 씻긴 듯 맑았다.

지금은 달집을 태우는 마을도 드물고, 부럼 깨무는 소리도 도시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보름이 오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환해진다. 둥근달을 보면 그 시절의 마당이 떠오르고, 부엌의 김이 떠오르고, 불길 속에서 환히 웃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보름은 단지 달이 둥근 날이 아니었다. 함께 모여 한 해를 건네받는 날이었다. 어둠을 나누고, 밝음을 믿는 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달이 저리 밝은 밤이면, 잊고 있던 소원 하나를 다시 꺼내 본다. 그 시절처럼 소박하게. 그 시절처럼 따뜻하게.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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